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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제나 May 30. 2021

'나'를 '우리'로 만드는 용기

아니 에르노 『사건』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녀의 솔직함에 놀라고 만다. 그녀는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한낱 개인의 경험으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전환하는 글쓰기에 능하고,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보편적일지언정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일깨워준다. 임신 중절이 범죄인 시대에 그녀가 써내려가는 이 적나라한 이야기 또한, 가히 용감할 정도로 솔직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겪게 되는 보편적인 ‘사건’임은 명확해 보인다.


일주일 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런 사건조차 내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_p.18


『사건』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겪는 과정과 감정을 매우 자세하고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임신 중절이 불법인 시대에 그녀는 뜨개바늘을 자궁 속에 넣기도 하고 스키장에서 스스로 몸을 굴리기도 한다. 간호조무사에게 불법 중절 수술을 받게 되었지만 이 또한 그리 안전한 방법은 아니다.


그녀가 이 글을 출간한 시기는 프랑스에서 임신 중절이 합법화된 이후였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이 글을 서랍 속에 고이 모시고 있다가 임신 중절이 범죄가 아니게 되었을 때에야 꺼내놓을 수 있었다. 이 글은 그 후로 몇 십 년을 거쳐 낙태가 불법인 2019년의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_p.38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2020년 12월 31일이 지난 지금 낙태죄 규정은 폐지되었다. 2021년 1월 낙태는 더 이상 한국에서 범죄가 아니게 되었지만 명확한 형태를 띠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다. 임신 중절이 범죄가 아닌 시대에 살고 있긴 하지만, 섣불리 범죄가 아니라고 말하기 힘든 현 상황에서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여전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임신 중절을 이야기하는 책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렇게 조심스럽고 어려운데, 자신의 경험을 전시하는 아니 에르노에게는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내가 겪은 임신 중절 체험―그것도 불법으로―이 끝나 버린 이야기의 형식을 띤다고 해서 그것이 그 경험을 묻히게 놔둘 타당한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정의로운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매번 ‘모든 게 끝났다.’라는 명목으로 이전 희생자들에게 입 다물 것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 이전과 똑같은 침묵을 일어나게 하는 일들을 다시 뒤덮어 버려도 말이다. _p.20     


낙태죄가 폐지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다. 아니 에르노가 불법 임신 중절을 감행하던 시대에는 법을 판단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현재 우리는 법을 판단하고 적극적인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낙태죄로 처벌받는 대상에 대해서, 낙태죄가 적용되는 시기에 대해서, 임신 중절이 허용되는 상황에 대해서, 임신 중절이 죄인지에 대해서. 오고 가는 치열한 대립 의견들 속에서 결국 재판부는 판단을 유보하고 시간에 결정을 맡겼다.


그러나 시간에 맡긴 결정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법적 공백 상태에서는 어떠한 판단도 함부로 내릴  없어 의사들은 임신 중절 수술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고, 의사와 정부의 기약 없는 대답과 들쭉날쭉한 수술비에 임신부들은 마음 졸인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이제는 임신부와 태아를 위한 최적의 선택을   있도록 법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어야  시기이다. 아니 에르노가 겪었던  모든 수모와 고난을 2021년의 임신부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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