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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부터 우크라이나전쟁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운명, 우연 혹은 신호?

by 제노아

2001. 9.11일 10시 30분, 미국 911 테러

2016년 6월 28일 오후 10시, 터키 아타투르크 공항테러

2016년 7월 15일 저녁 8시 40분, 터키 쿠데타

2018년 7월 20일 밤 9시경, 터키 지진

2020년 8월 4일 오후 4시경, 레바논 러시아선박 폭발

2021년 2월 24일 새벽 4시 30분, 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뉴스에 대서특필된 대형사건들.

이 사건 모두에서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인생세간 삶은 쉽지 않다. 한국의 평범한 한 남성이 겪기에는 너무나 기가 막힌 우연적 사건들, 왜 하필 그때, 왜 하필 거기에 내가 있어야만 했을까? 이것을 단지 운명이라, 우연이라 치부하기에 내 경험은 아주 특별하고 파란만장하다.


성공과 실패가 우리들 삶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얘기일진대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경험한 나는 보편적이지 않은 삶을 산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나의 경험들이 도대체 내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인가?


그냥 얘깃거리로 치부할 수 있으나 더 큰 시야에서 깊게 들여다보면 하늘이 내게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닌지 뇌피셜로 해석을 하게 된다.




2001. 9.11일 10시 30분,


거래선 미팅 일정이 잡혀 9.10일 밤에 뉴저지에 도착, 메리어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시차로 인해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아침 8시 30분에 개발실, 영업부서의 상사와 조식회의를 시작했다. 뻔한 미국식 아침을 먹으면서 그날의 미팅 안건에 대해 조율을 하고 있었다. 당시 거래선은 미국에서 꽤 비중이 컸던 리테일러 B사였고 사안이 큰 건이었기에 출장을 갔던 나와 보스 2명은 다소 긴장을 하고 있었다.


첫 음식을 삼키고 커피를 마시려는 순간, 뉴스의 긴급보도가 시작됐다. 작은 비행기가 뉴욕 중심부에 있는 세계무역 센타 빌딩에 부딪힌 장면이 실시간 생방송으로 생중계되자 우리도 미팅을 잠시 멈추고 뉴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17분 뒤에 더 큰 비행기가 무역센터 빌딩에 한번 더 부딪혔고 건물은 순식간에 동강이 나는 장면이 생중계됐다. 무시무시한 장면과 '테러'라는 단어가 기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동요는 거세졌다. 몇 분 뒤, 대피를 알리는 호텔비상벨이 울렸고 우리는 미팅을 취소하고 서둘러 대피했다.

나는 그 순간, 테러가 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약 10일간 미국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왜 하필 그날, 나는 미국에 있어야 했을까?


2016년 6월 28일 오후 10시,


오랜만에 집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나는 요란스러운 전화벨소리에 깼다. 총무과장인 술레이만이 다급한 목소리로 아타투르크 공항에 테러가 일어났고 사망자가 많다고 했다. 2016년 1월 10일부터 발생한 폭탄 테러는 이스탄불 중심으로 곳곳에서 일어났고 사망자도 상당한 수에 달했다. 이날이 벌써 5번째 테러 공격이었고 사망자가 제일 크게 발생한 사건이었다.

인간의 운명은 이런 것인지 2016년 6월 29일 새벽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테러로 사망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어머니 소식을 접한 것이다. 슬픔은 두 배가 되었고 정신 줄을 놓기도 했다. 급하게 서둘러 한국으로 가려했으나 공항 테러로 비행기 운항이 중단되어 어머니 장례식도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 불효자가 된 것이다. 나의 운명이 이렇게 가혹한 것이었나?

왜 나는 터키 테러 현장에 있으면서

어머나 사망 소식을 들었어야 했을까?


2016년 7월 15일 저녁 8시 40분,


나는 이스탄불 집에서 바쁜 일과를 마치고 쉬고 있었다. 이날의 전화소리가 유달리 소란했다. 로컬 직원인 Baris가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보스포루스 해협 2 대교에 군인들과 탱크들이 막고 있다고 했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쿠데타라고 판단했다. 판단 즉시, 대사관, 영사관에 사실을 알렸고 가족들과 직원들의 안전을 챙기기 시작했다. 역시 내 판단이 맞았다. 군부 쿠데타였고 밤새, 총소리와 헬기 소리로 혼란스러웠고 방송과 SNS에서 쿠데타 군부와 맞서 싸우는 경찰과 시민 소식,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여러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쿠데타가 터지니 나라는 친대통령파, 친군부파로 극명하게 분열이 되기 시작했다. 쿠데타는 약 7시간 만에 끝났지만 그 밤의 시간은 일곱 달과 같았다. 쿠데타 상황에서도 기업가 정신으로 회사, 직원, 가족, 한국민을 챙기는 본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왜 나는 그날, 터키의 군부 쿠데타 현장에 있었을까?


2018년 7월 20일 밤 9시경,


이스탄불 집에서 거실에서 TV를 보는데 땅이 흔들리면서 보고 있던 TV가 앞으로 엎어졌다. 가족 모두는 혼비백산했고 순간 판단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빌라 중앙 공원으로 나갔다. TV가 넘어지는 정도의 지진을 겪어 본 적이 없었기에 이 날 지진은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날 확실히 깨달았다.

왜 나는 이국 땅 터키에서 지진을 겪어야 했을까?


2020년 8월 4일 오후 4시경,


두바이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오후 세션이라 회의도 다소 느슨했다. 4시 40분경, 회의실로 로컬 인사 담당 인력이 허겁지겁 황망한 표정으로 들어와 레바논 항만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선박에서 대형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고 알렸다. 레바논 지점은 나와 일하던 후배가 거점장으로 있던 곳이어서 바로 전화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 지점 사무실과 주재원 집의 유리창들이 다 박살이 났고 이렇게 큰 폭발과 진동을 처음 경험했다고 했다. 중동은 조용할 날이 없기에 전쟁이 났다고 순간 생각을 했지만 이 폭발사고는 전쟁에 버금갈 만큼 레바논 GDP 17%를 한 순간에 날려버린 큰 사건이었다.

나는 왜 이 시간에 중동에서 미팅을 하고 있는 것일까?


2021년 2월 24일 새벽 4시 30분,


나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CIS 지역 사업의 책임자로 근무 중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전쟁이 일어난 그 시점이다. 서둘러 비상대책반을 만들고 24시간 상황실을 가동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모두 나의 관할 국가였기에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업은 제쳐두고 우크라이나 법인, 러시아 법인 회사 직원 간의 갈등을 우선 챙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전쟁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업은 중단시켰다. 해외에 판매를 하려고 나온 법인이 판매를 못하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내 인생에 단 1만큼도 예상하지 못한 전쟁을 여기서 경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왜 그 순간, 전쟁을 발생시킨 모스크바에 있어야 했을까?




내 인생이 기구해서일까?

내가 특별한 경험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일까?

이 지면에 다 적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사건들은 나는 그 나라, 그 현장에서 겪었던 것이다. 소소한 사건이 아닌 글로벌 뉴스에 등장한 세계적인 대형사건들을 말이다. 왜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일까?


운명의 심오함을 거론하기에 나는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내가 아닌, 더 큰 존재의 시선에서 나라는 사람을 투영했을 때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안다. 단지 '운명'이라, '우연'이라 취급되기에는 많은 대형사건들이 간접이 아닌 직접경험으로 내 인생에 들어온 것은 이 경험을 나라는 사람이 겪음으로써 어떤 행보를 가야 할 필요가 있음이 아닐까?


거부할 수 없는 진리, 이치라는 것이 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고

모든 사람에게는 응당한 의무가 있으며

모든 현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곧 드러날 이면이 존재한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도 그렇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어떤 의무에 대한 숙지일 수도 있으며

내가 경험한 모든 현상을 통해 나는 그다음 드러내야 할 이면의 인생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두려움은 빛이 아니라 이치로써 떨칠 수 있다(주 1).


지난 35년간 겪은 특별한 경험들이 막연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며 막연하게 운명이니 우연이니 또 막연하게 삶을 대하는 두려움을 거론하기보다 이치로써 나의 경험을 해석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앞으로 인생의 또 다른 행보를 시작할 내가 이 경험들을 그저 '다시 굴릴 수 없는 의지의 돌덩이(주 2)'인 과거로 치부할 것인가, 아니면 이치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를 위한 근거로 삼을 것인가.


주 1>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2012, 아가넷

주 2>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2000,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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