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of the Mountains
산악의 여왕
키르기즈 50솜짜리 지폐의 표지인물은 머리 위로 붕대를 둘둘 말아 두른 듯 특이한 전통모자, 엘레첵(Elechek)을 쓴 할머니다. 그 분이 “산악의 여왕”이란 별명으로 키르기즈 민족을 구한 민족의 영웅이자, 강인하고 지혜로운 여성의 표상으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는 쿠르만잔 다트카(Kurmanjan Datka(1811-1907)다.
시대를 앞서 간 여인
쿠르만잔은 1811년 키르기즈스탄 남부 알라이 산악지대(천산산맥의 남쪽 끝 산계)의 키칙알라이(Kichik-Alay) 마을에서 망구쉬 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승마를 즐기고 초원을 가로질러 가축을 돌보면서 활달하게 자라났다. 당시의 혼인 적령기인 18세에 이르자 여느 유목민의 딸처럼 그녀도 일면식도 없는 나이 많은 남자와 정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의식이 강했던 그녀는 사랑없는 결혼을 거부하고, 결혼식 전날 밤 시댁이 될 부족 마을을 탈출하여 천산산맥을 넘어 중국 땅으로 도주해 버린다. 이런 일탈은 21세기에도 용납받기 어려운 행동인데 하물며 19세기 초 키르기즈스탄 부족사회에서는 상대방 집안에 대한 되돌이 킬 수 없는 모욕이자, 자기 집안에 대한 명예실추로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처녀 혼자 몸으로 야밤에 4,000m 설산을 넘어 도주하는 행동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용기였다.
다트카 쿠르만잔
그녀는 상당기간 중국에 머물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21살이 된 1832년 자신을 사랑한 12년 연상의 남성과 결혼한다. 그 상대가 알라이 지역의 지배자였던 Alymbek Datka였다. 결혼 후 남편인 알룸벡은 코칸드칸국의 정치인으로 복잡했던 국제정세 속에서 키르기즈 민족의 단결과 코칸드 왕국을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지만, 쿠르만잔은 아들 3, 딸 2을 기르며 내조만 하였을 뿐 일체의 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 결혼생활 30년째인 1862년 알룸벡은 코칸드 왕국의 궁정 분규에 휘말려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졌던 ‘다트카’란 호칭(Datka란 말은 키르기즈어로 ‘여왕’‘이란 의미이지만 페르시아어로 ‘공정한 지배자’란 의미의 단어 Dadhoh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된다)은 미망인이 된 쿠르만잔에게 공식 승계된다. 그 때 그녀의 나이 52살이었다. 한 번도 정치에 관여해 본 적이 없던 여인은 운명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혼란기에 부족장 직이 공석이 될 경우 알라이 키르기즈 부족의 독립도 사라질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슬퍼할 틈도 없이 다트카로서 부족정치에 매진하였고, 복잡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 속에서 알라이 지방의 모든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된다. 그녀는 인도의 대영제국 총독부에서 부하라칸국을 찾아가는 영국인 사절들이 눈 속에 파묻혀 곤경에 처했을 때 구출해 주기도 하였다. 그 시절 현지인들 뿐 아니라 이 지역을 찾는 모든 외국인 사절들은 그녀를 방문하여 경의를 표하곤 했다. 그녀에 대한 호칭인 다트카는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코칸드왕국 뿐 아니라,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왕조였던 부하라의 에미르(Emir) Muzaffar도 수여한다. 키르기즈 역사상 그녀 이전의 어떤 여인도 다트카란 칭호를 부여 받은 적이 없다.
격변의 시대와 그녀의 선택
그러나 19세기 후반은 이미 러시아가 카자흐스탄은 물론 키르기즈스탄의 북부까지 점령한 후 남진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남편도 평생을 러시아에 대적하였을 뿐 아니라, 키르기즈 민족의 열혈 청년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쿠르만잔은 국제정세를 냉정한 눈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모한 애국심으로 젊은 청년들이 죽어가고, 그로 인해 자기 민족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하에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스스로 속국의 길을 택한다. 허망한 독립의 꿈보다, 냉정한 생존의 길을 택한 것이다. 1876년 러시아는 알라이 지방을 병탄(倂呑)한다. 이후에도 키르기즈 청년들은 간헐적으로 러시아 군대를 습격하고, 러시아의 강요된 질서를 거부한다. 1893년에는 그의 아들과 두 손자가 밀수를 하고 세관원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다. 그녀는 구명청탁을 하라는 주변의 압력을 물리치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는 아들의 총살형 집행까지도 참관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손자는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송치된다. 냉혈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희생되는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도, 더 이상 러시아와 싸우는 무모한 전투를 통해 키르기즈의 젊은이들이 희생되는 소모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그녀의 판단을 존중하고 그녀를 ‘알라이의 여왕’이라고 호칭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러시아의 황제 짜르 니콜라스 2세는 값진 보석으로 장식된 여성용 황금시계를 제작하여 키르기즈스탄으로 보내고, 인근 오쉬의 지역책임자가 최고의 의전으로 황금시계를 들고 가서 그녀에게 수여하도록 지시한다.
은둔과 그녀의 유산
그러나 자기 아들이 처형된 이후 그녀는 사실상 모든 공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생을 마칠 때까지 자기 마을에서 은둔 상태로 살아간다. 그리고 96세의 나이에 소천한다. 그녀는 2명의 아들, 2명의 딸, 31명의 손주, 57명의 증손주, 그리고 6명의 고손주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는다. 그리고 오쉬시 인근 그녀의 고향인 마디(Mady) 마을, 러시아군에 의해서 총살당했던 자기 아들 캄치벡의 무덤 옆에 나란히 안장된다. 2004년 비슈케크시의 에르킨딕 가로공원에 그리스 신전 양식의 반원형 열주에 둘러싸인 그녀의 실물 크기의 조각상이 건립되었다. 탄생 200주년을 맞는 2011년은 정부에 의해 ‘쿠르만잔 다트카의 해’로 공식 선포되었고, 2014년에는 그녀의 일생을 다룬 영화 “Queen of the Mountains”가 제작되어 그 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 부문 후보로도 지명되었다. 2011년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Rosa Otunbayeva는 ‘쿠르만잔 다트카의 해’를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지를 발표하였다. “쿠르만잔 다트카는 드물게 보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녀는 코칸드칸국, 중국, 러시아가 지배하는 매우 어려운 시기에 (민족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녀의 지혜와 외교적 수완은 우리 민족을 죽음과 파괴로부터 구해냈다. 그녀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코칸드칸국도 러시아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영웅 혹은 배신자
그러나 러시아가 그녀를 진정으로 존중했을까하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녀는 러시아제국의 꼭두각시였거나, 아니면 중앙아시아를 손쉽게 지배하기 위해 추켜세운 ‘상징 조작된 영웅’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누군가는 그녀가 받아드린 러시아 식민지가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독립이냐, 죽음이냐”란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한국인의 시각으로는 일견 용납되지 않는 비겁한 행동이다. 한국 같으면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일신의 안위를 도모한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여인으로 매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키르기즈인들은 아직까지도 그녀를 존경하고 있다. 그녀는 제정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그의 부족을 구했고, 94세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키르기즈 민족의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마치 구약성경의 선지자인 에레미야가 온갖 오해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근동의 패권국인 바빌론제국과 싸우지 않고 순응하면서 생존하고 때를 기다리는 현실적인 선택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21세기의 예로는 수많은 동포들이 전장터에서 산화되고, 거대한 영토를 빼앗겨 버리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무모함과 비교해 볼 때 쿠르만 다트카의 선택은 종국적으로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시절 뿐 아니라 독립 이후에도 그녀는 키르기즈의 영웅으로 추존되고 있다.
지폐 속의 사진
1906년, 후일 핀란드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Karl Gustav Mannerheim은 제정 러시아 정보국의 대령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는 비밀 정찰여행 길에 쿠르만잔 다트카를 예방하여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이 현재 키르기즈 50솜 화폐에 인쇄된 95세의 쿠르만잔 다트카였다. 그리고 6개월 후 그녀는 임종을 맞는다.
<부록>
알룸벡 이야기
쿠르만잔 다트카의 남편인 알룸벡 다트카(1799-1862)는 19세기 복잡한 중앙아시아의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알라이 지역에서 태어난 키르기즈인이었지만,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코칸드칸국의 관료 및 정치인으로 살아간다. 그는 젊어서 한 때 오르몬 칸의 휘하에서도 일한 바 있으며, 키르기즈 민족을 보호하고 코칸드 왕국을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알라이의 사자’라고 불리던 당대의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코칸드 칸국의 내부 쿠데타를 획책하고 조정했던 불충한 권신이었다.
알룸벡은 1799년 키르기즈 남부의 바르구(Bargy) 부족의 지도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대상들을 따라서 중앙아시아는 물론, 동투르키스탄, 이스탄불까지도 여행하여 부를 축적했을 뿐 아니라 외부세계의 동향과 지정학적 역학관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1826년 코칸드 왕국으로 연결되는 천산남로 실크로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하던 코칸드의 Madali칸(재위기간 1822-1842)은 그 지역의 강력한 부족인 바르구 부족의 유망한 청년 알룸벡을 자기 신하로 발탁하고, 31살에 다트카란 칭호를 수여한다. 그리고 1832년 알룸벡은 안디잔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된다. 그 해 그는 매력적이고 똑똑한 여인인 21살의 쿠르만잔과 결혼한다.
1847년 킵차크칸국의 후대 왕조로 오늘날의 중국 신장 카슈가르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동투르키스탄 왕조의 지배자인 호자 튜레(Khoja-Tyure)는 점점 다가오는 청나라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기로 작정하고, 코칸드칸국의 안디잔 지역 총독이었던 알룸벡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천산산맥 넘어 살고 있는 동족인 알라이부족이 만주족(청나라)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분개하고 있던 알룸벡은 코칸드칸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병력을 움직여서 호자 튜레와 함께 청나라 군대를 카슈가르에서 몰아낸다. 그러나 대규모 지원군이 합류한 청나라 군대는 카슈가르를 재탈환하고, 호자 튜레와 알룸벡은 천산산맥 넘어 알라이지방으로 퇴각한다. 그들을 뒤따라 신장지역의 위구르족과 키르기즈족들이 천산산맥을 넘어오다가 상당수가 추위와 기근에 희생당하고, 살아남아서 오쉬까지 다다른 피난민들도 자기 자식을 노비로 팔아서 연명해야할 만큼 곤궁한 생활을 이어간다.
패전하여 알라이지방으로 돌아 온 알룸벡에겐 책임추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코칸드왕국의 Khudoyar 칸을 폐위하고 그의 형인 Mallya를 옹립하는 궁정 쿠데타에 앞장 선다. 알룸벡의 옹위 하에 Mallya-bek은 1858년에서 1862년까지 코칸드의 칸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실각한 Khudoyar 칸은 라이벌 왕국인 부하라로 도망친다. 1860년 키르기즈 반군들의 도움을 받은 러시아군이 피시페크(현 비슈케크)와 토크목에 있던 코칸드군의 성채를 차지하자 Mallya칸은 알룸벡에게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알룸벡은 코칸드군 12,000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키르기즈스탄의 중심부를 관통하여 피슈케크 인근의 추이지방에 도달한다. 거기서 그들은 서쪽에서 행군해 온 같은 코칸드칸국의 타슈켄트 총독인 Kipchak Kanaat-shaa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한다. 그러나 전체 통솔권을 두고 두 군대의 총사령관들끼리 알륵이 생기고, 동족 살해하기를 저어하는 알룸벡은 전투에 협조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코칸드칸국의 러시아군 퇴치는 실패로 끝난다. 이듬해 코칸드칸국은 다시 한번 더 원정군을 조직하나, 알룸벡을 포함한 키르기즈족은 이번에는 원정군 참여 자체를 거부한다. 이 일로 알룸벡의 코칸드 궁정 내의 위상은 급락하고, Mallya칸은 군대를 보내 알룸벡 체포를 명령한다. 겨우 목숨을 건져서 알라이 산 속으로 도망친 알룸벡은 키르기즈 부족장들과 공모하여 또 다른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1862년 2월 Mally칸을 폐위/살해하고 12살짜리 Sha-Murad를 칸으로 옹립한다. 그리고 알룸벡은 코칸드칸국의 수석 총리(vizier)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쿠데타 동지였던 Alymkul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나고, 그해 여름 부하라 칸국에 망명중이던 전임 칸 Khudoyar가 부하라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코칸드 왕국을 침입하여 왕위를 회복하고 알룸벡을 포함한 키르기즈계 반정파들 모두를 숙청해 버린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코칸드칸국은 알라이 부족을 달래기 위해 알룸백의 미망인인 쿠르만잔에게 다트카의 직위를 하사하고, 민족 절멸의 위기를 자각한 쿠르만자르는 부족을 설득하여 일단 코칸드칸국에게 저자세로 임하고, 몇 년 후에는 남진하는 러시아 세력에게도 유화책을 통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여 알라이 부족뿐 아니라 남부 키르기즈 부족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