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의 영웅(3): 오르몬 칸

최후의 유목민 전사

by 천산산인

카라키르기즈 최초이자 최후의 왕

오르몬 칸(Ormon Khan, 1792-1854)은 카라키르기즈 칸국(1842-1854)의 최초이자 유일한 왕이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는 빼어난 전략가이자, 키르기즈 민족 최초의 근대국가 건설을 꿈꿨던 계몽군주였지만, 독재자였고, 외세의 힘을 빌어 중앙아시아 유목민 사회의 전통적 질서를 뒤흔들고자 했던 시대의 이단아이기도 했다.

오르몬 니야즈벡(Ormon Niyazbek uulu)은 이시쿨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부족인 사루바구시(Sarybagysh)족의 족장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출중한 자질을 엿보였고, 전사로서 길러졌다. 아울러 전통 악기인 코무즈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는 예인(藝人)으로 성장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성을 입증했고, 25세에 사루바구시 부족의 족장이 된다. 그는 부족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명성을 얻고, 다른 부족으로도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카라-키르기즈 칸국

1840년대 초 키르기즈족을 지배하고 있던 코칸드왕국이 부하라칸국 및 중국 청제국과의 전쟁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궁정 내부 정쟁으로 혼란기에 놓여 있을 때인 1842년 부하라칸국이 코칸드를 침입하여 지배자인 Muhammad Ali Khan을 살해한다. 키르기즈 민족은 코칸드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해 여름 북부지역의 키르기즈족들이 이시쿨 호수 서쪽의 도시 코치콜에서 쿠릴타이(족장회의)를 개최하여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50세가 된 오르몬 니야즈벡을 칸으로 추대한다. 그는 나라 이름을 ‘카라 키르기즈칸국(위대한 키르기즈 왕국)’으로 선포한다. 대관식은 키르기즈 전통 의식에 따라 흰 펠트 양탄자에 앉은 오르몬에게 족장들이 붉은 털로 관을 짠 전통모자 테베테이를 씌우고, 그가 하늘을 향해 세 번 일어났다 앉는 제천의식으로 칸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9개 부족을 기념하기 위해서 9마리의 흰말을 잡아서 제사 지냈다. 오르몬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법 기반과 제도를 확충한다. 먼저 ‘Ormon ukuu’ (오르몬의 칙령)”란 법령을 공포하여 유목민의 전통에 기반을 둔 형법을 제정선포하고 엄중하게 법을 집행하였다. 또한 족장들과 원로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활성화하여 공동체의 질서와 공유재산을 확립하였다. 오르몬은 이시쿨 호수 북쪽 오늘날의 세묘노브 협곡에 수도를 정하고, San-Tash pass에 진지를 구축하여 여름궁전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외치를 강화하기 위해 Bayserke란 관리를 외교관으로 임명하여 코칸드칸국과의 대외협상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saza’란 관직명의 ‘순회 특명전권대사’를 임명하여 우즈벡, 러시아, 그리고 남부 키르기즈 부족장들과의 외교적 접촉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들은 주변국들에게 카라 키르기즈칸국의 위엄을 내보이기 위해 자주 고압적인 태도로 임하였기에 러시아인들은 이들을 ‘Terror Ormonicus(무서운 오르몬족)’라고 희화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또 페르가나지방과 타슈켄트에서 오는 상인들에게 규제를 가하였다. 또한 군대를 확충하여 조련시켰고, 30인의 정예 경호부대를 구성하여 최측근으로 배치하였다. 군대는 정례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전통 관악기로 행군중 사기를 북돋았다. 또한 그는 이슬람을 진흥하였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매우 영리한 정치 및 군대 지도자라고 평가하였다.

독립왕국의 기세

코칸드왕국은 오르몬을 동맹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에게 엄청나게 고귀한 직함인 ‘Parvanachi’란 직명을 하사하나, 오르몬은 코칸드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속국의 지위를 파기해 버린다. 1842년과 1843년에 오르몬은 이시쿨과 나른 지역에 있던 코칸드왕국의 진지를 부수고 코칸드 주둔군을 추방해 버린 후, 발륵치에 있던 코칸드칸의 궁전도 불살라 버린다. 1844년에는 비슈케크에 있던 코칸드의 성채를 장악해 버린다. 이런 행위를 통해 오르몬은 키르기즈가 코칸드칸국과 대등한 독립 국가임을 표방하였다.

1846년에는 카자흐의 Kenesary 칸이 카스피해 북부의 Orenburg에서 내려온 러시아 군에 밀려 키르기즈와의 변경지역인 제티수 지역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사신을 보내 동맹을 체결하여 러시아 및 코칸드왕국에 대항해서 싸을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오르몬은 족장회의를 거쳐 이를 거절하고, 카자흐족에 충성하는 부족들을 공격한다. 이에 격분한 Kenesary칸은 1847년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카라 키르기즈 영토로 침입하여 추이계곡의 토크목을 점령한다. 오르몬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나 거절되자 스스로 군대를 동원하여 이에 맞선다. 그는 짐짓 퇴각하듯 적군을 키르기즈 영내로 끌어들인 후 천산산맥 기슭에 이르자 군대를 10명 단위로 분할하여 높은 산 위로 올려 보내서 이곳저곳에서 나무를 잘라서 횃불을 만들게 한다. 카자흐 군이 주둔한 계곡 위의 온 산등성이가 불길로 타오르자 카자흐 군대는 키르기즈 군대가 매우 많은 것으로 착각하고 두려움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카자흐군을 둘러싼 상태에서 여러 날이 지났다. 어느 날 밤 키르기즈군은 온 계곡이 울리도록 찌렁찌렁 나팔소리를 불며 카자흐 군대를 급습하여 Jantay가 카자흐 왕자인 Seren을 창으로 살해하고 퇴각한다. 첫 대전 이후 사기가 떨어진 두 명의 카자흐 술탄이 자기 산하의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한다. 남겨진 카자흐 군인들도 대혼란에 빠져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오합지졸이 된 카자흐 군대는 무칸(Mykan)에서 키르기즈 군대에게 대패 당하고 케네사리도 생포된다. 이 전투에서 32명의 카자흐 술탄도 피살되었다. 케네사리는 카라수강 언덕에서 사형에 집행되었고, 그의 머리는 수습되어 옴스크(Omsk)에 있는 러시아 사령관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1세에게까지 전달된다. 러시아 황제는 기뻐하며 오르몬과 잔타이에게 금메달과 금장식 제복을 하사하였고, 오르몬을 러시아제국군의 장교로 임명하였다. 1847년 키르기즈와 카자흐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이후 카자흐는 러시아의 속국으로 편입되어 버린다. 오랫동안 카자흐를 차지하지 못해서 안달하던 러시아의 염원을 오르몬이 일거에 해결해 준 것이다. 그러나 보상치고는 너무나 박했다. 그에게 내려진 계급이 별 세 개 중장도 아니고, 중령이었으니... 1848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집달관(bailiff)인 Wrangel 남작은 오르몬에게 향후 러시아의 도움과 시민권 수여를 약속하고 코칸드 원정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응하여 키르기즈 군대는 키르기즈 영토 내에 있던 코칸드의 주요 성채를 함락시켜 코칸드왕국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1852년에는 러시아 서시베리아 군대의 총독인 Gustav Gasford 장군이 키르기즈군의 공로를 치하하고, 이 지역에서 장차 카자흐의 봉기를 억누르기 위해 Trans-Ili계곡의 카자흐 땅(현재의 알마티 주변의 광활한 토지)을 키르기즈족에게 하사하자는 건의를 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땅에 떨어진 민족의 영웅

강력한 외부의 적들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르몬은 내부 부족들과의 불화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이시쿨호수 북쪽에 할거하고 있던 Bugu부족(bugu는 키르기즈어로 사슴)은 라이벌인 사루마구시 부족이 키르기즈 민족을 대표하는 것에 대해 시기심을 갖고 있었고, 특히 척박한 땅에서 사는 사루마구시족이 언젠가 자기네 비옥한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부구 부족은 오르몬에게 순종하지 않고 비밀리에 러시아군을 끌어들여 오르몬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로 인해 양 부족간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에 오르몬은 전쟁을 선포하고 부구 부족을 침공한다. 거대한 카자흐족과 우즈벡족을 물리친 오르몬이었으니 얼마 안되는 부구 부족을 쳐부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 같이 생각되었다. 처음에는 쉽게 이겼다. 그러나 너무 자만한 채 소수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Semyonovka에 있는 부구족의 주요 거점을 침탈하는 전투에서 오르몬은 그만 패전하고 포획 당하고 만다. 부구의 족장인 Borombay Bekmuratov는 오르몬을 인질로 잡고, 부구족을 다시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하였으나, 부구족의 지도자중 한 명인 Balbay-baatyr가 결박 상태의 오르몬을 창으로 찌른다. 오르몬은 치명상을 입고 그의 딸의 유르트로 옮겨지나, 결국 딸의 팔에 안겨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840년 위구르제국을 무너뜨렸던 위대한 선조들 이래 1,000년 만에 나타난 민족영웅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그는 친척에 의해서 비밀리에 매장되어 아직까지도 그 장소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영웅이 떠난 후

오르몬의 피살에 대노한 사루마구시 부족은 총사령관이었던 Torogeldi와 오르몬의 아들인 Umetaaly가 대군을 이끌고 부구족을 침공하여 큰 승리를 거둔다. 부구족은 천산을 넘어 중국으로 도주하여 청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요청하나 청나라는 한 때 자신의 부하로 있다가 러시아의 부하가 된 족장 Borombay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보고 거절한다. 할 수 없이 부구족은 북쪽으로 다시 한번 천산을 넘어 카자흐족의 영토로 들어가서 러시아에 항복하고 러시아의 신민이 된다. 러시아에겐 앉아서 중앙아시아 일대를 다 점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 일 이후 러시아는 이시쿨 호수를 따라 초소를 건립하고, 키르기즈 민족을 압박해 들어간다. 1862년에는 오르몬을 이어 사루마구시 부족의 지도자가 된 Jantay도 러시아의 신민이 된다. 그 다음 해 오르몬의 아들인 Umetaaly가 군사를 일으켜 러시아군에 대항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천산 너머 동투르키스탄의 수도인 카슈카르로 망명한다. 이후 키르기즈 민족의 땅은 러시아에 의해 차례차례 점령당하고 1867년까지 키르기즈스탄은 러시아에 완전히 편입된다.

오르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누군가는 그가 최초의 키르기즈 근대 왕국을 수립하여 키르기즈 민족을 통일한 위대한 영웅이라고 추앙하는 반면, 혹자는 그가 잔인하게 나라를 운영한 독재자였고 외세의 세력을 끌어들여 중앙아시아 전체를 그들의 손에 넘겨준 사람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2002년 비슈케크의 징기스 아이트마토프 거리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부록>

부구족의 전설

Bugu부족에게는 키르기즈 민족의 원류(源流)를 보여주는 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옛날, 예니세이강에서 절멸 당한 부구족의 어린 아들딸들이 사슴(bugu)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수천 km를 남하하여 이시쿨 호수에 이르러 정착하고 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는다. 첫 아들은 그곳에, 둘째 아들은 호수 건너 나른에 정착하여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이 전설은 키르기즈의 민족작가인 징키스 아이트마토프의 1970년 소설 <하얀 배>의 모티브가 되고, 우리나라의 작가 윤후명 씨도 그 전설을 모티브 삼아 중앙아시아에 사는 고려인 소년이 한국어를 배워가는 과정을 줄거리로 한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썼다. 윤후명씨는 이 소설로 1995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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