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 독립 정신의 아버지
키르기즈족 최초의 에미르
9세기-10세기에 걸친 전성기를 누린 키르기즈 민족은 13세기부터 발흥하는 몽골제국의 확장세에 밀려 큰 위기에 처한다. 이들은 부족별로 각자도생하면서 점점 남하하여 천산산맥 기슭에서 부족공동체로 소박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15세기말까지도 키르기즈 민족은 40개의 부족 간에 단합을 이루지 못한 채 내부 갈등만 팽배해진 상태였다. (참고로 ‘키르기즈’란 말의 어원이 터키어로 ‘40’이란 뜻이다.) 1508년, 수세기만에 처음으로 ‘타가이 비이(Tagai-biy, 1470-1533)’란 지도자가 나타나서 40개 부족의 대부분을 통합하여 ‘키르기즈칸국(Kyrgyz Khanate)’을 수립하고 스스로 ‘키르기즈 연방령(領, ulus)’을 통할하는 에밀(Emir) 임을 선포한다. (여기서 biy는 키리기즈에서 지도자급 인사로 sultan보다는 낮은 직급에 해당) 그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외래 종교인 이슬람을 지원한 첫 번째 지도자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Mohammed Kyrgyz’, 즉 ‘키르기즈의 마호멧’라고 불렀다.
독립 투쟁
그는 당시 중앙아시아의 패권국가였던 모굴리스탄(Moghulistan, 몽골계 차가타이칸국의 후대 왕조)의 사이드 칸(Said Khan, 재위 1514-1533)과 동맹을 맺고, 동투르키스탄(오늘날의 중국 신장성)을 정복하는데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도움 하에 1514년 술탄 사이드는 카슈가르, 호탄, 야르칸드 등 도시를 함락시킨다. 그러나 동투르키스탄 정복에 성공한 술탄 사이드는 키르기즈칸국을 동맹국이 아니라 그들의 속국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는 키르기즈 민족과의 동맹약속을 무시하고 키르기즈군이 이슬람을 경배하지 않고, 이슬람 도시들을 약탈했다는 이유로 1517년 군대를 파견한다. 그들은 천산산맥의 서쪽 이시쿨 호수 남단의 바르스쿤에서 전투를 벌이나 키르기즈 군대가 패하고 마호메드는 생포되어 천산산맥 동편의 도시인 카슈가르(현재 중국 신장성의 도시로 다클라마칸 서부에 위치)의 감옥에 투옥된다. 그리고 키르기즈민족을 통치하는 총독으로 자신의 장남인 라시드를 파견한다. 그러나 키르기즈 민족은 총독에게 복종하지 않고 카자흐족을 끌어들여 모굴리스탄에 저항한다. 이에 사이드는 유화책으로 키르기즈족을 간접 통솔하기 위해, 모하메드를 석방하여 키르기즈 총독으로 파송한다. 그리고 모하메드를 감시통제하기 위해 그의 아들인 라시드를 군사령관으로 함께 보낸다, 그러나 모하메드는 비밀리에 카자흐 및 우즈벡과 협의하여 몽골세력을 물리치려고 하였다. 1524년 모하메드는 카자흐의 술탄인 타히르와 비밀협정을 맺고 반란을 꾀하나 마지막 순간에 타히르가 군사를 보내지 않아서 몽골군에게 발각되고 또 다시 붙잡혀서 카슈가르의 감옥에 재투옥된다. 그리고 남은 인생 16년을 감옥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도 사이드칸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모하메드가 재투옥된 이후에도 키르기즈인들은 라시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며 카자흐의 세미레흐예(Semirechye)와 강력한 군사-정치 동맹을 체결한다. 1525년 사이드 칸은 라시드를 보호하기 위해 추가 병력을 파견하나, 1526년 카자흐 술탄 타히르의 지원을 받은 키르기즈인들은 봉기하여 라시드를 쫓아내 버린다. 몽골군은 자기들에게 협력했던 키르기즈인들을 천산산맥 서쪽 골짜기인 아트바시(At-Bashi)에 남겨두고 철군의 명분을 쌓기 위해 양 10만 마리를 끌고 간다. 그래서 이 사건은 후대 사람들이 조롱하는 말투로 ‘양 습격전’이라고 불렀다. 1527년에는 키르기즈인들이 동투르키스탄을 침범하여 상당수의 말을 나포해 온다.
끝없는 항쟁
1533년 술탄 사이드가 죽고 그의 아들인 라시드가 술탄이 된다. 마호메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적국에서 죽음을 맞는다. 라시드는 우즈벡의 칸과 협력하여 키르기즈를 압박한다. 1537년 양 진영의 대규모 충돌에서 키르기즈-카자흐 연합군이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르기즈스탄은 카자흐의 칸인 카크 나자르(Khakk-Nazar)를 지도자로 받아들이면서 키르기즈가 몽골에 복속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라시드의 아들인 압둘 알 라티프(Abd al-Latif)가 침공해 오나 키르기즈-카자흐 연합군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를 살해한다. 그러나 키르기즈와 카자흐 사이에 내부 분열이 일어난 틈에 몽골군이 다시 침범하여 카크 나자르가 살해된다. 이리하여 16세기 중반에 키르-카자흐 연합은 붕괴되고 카자흐는 북쪽의 일리강과 사리다리야 지방으로 철군한다. 이후에도 키르기즈인들은 천산에 주둔하면서 게릴라식 항전을 계속하고 몽골군은 더 이상 침범할 수 없었다. 그렇게 키르기즈민족은 몽골의 예속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키르기즈 독립정신의 아버지
모하메드 키르기즈는 불과 재위 9년만에 적군에 생포되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적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따라서 그가 키르기즈스탄을 강성하게 하거나 영토를 확장시킨 위대한 군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수백년만에 최초로 키르기즈의 40개 부족을 단결시켜서 하나의 독립왕국으로 재편성하였고, 16년동안 적국 수도에 유폐되거나 투옥되어 있으면서도 몽골에 굴종하거나 협력하지 않고, 일관되게 키르기즈의 독립을 주장해 왔다는 점에서 키르기즈 민족 저항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키르기즈 민족은 단결-각성하여 수백년동안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모하메드는 키르기즈 독립의 밑거름이 된 분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존경 받는 키르기즈의 독립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