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전설의 갈림길에 서있는 경계인
키르기즈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가 ‘마나스(Manas)’다. 좋던 싫던 도착할 때부터 떠날 때까지 키르기즈에서는 곳곳에서 마나스를 마주칠 수밖에 없다. 키르기즈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유산이 바로 ‘마나스’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장의 구전 서사시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인 마나스는 8세기 실존 인물로 추정/주장되는 민족영웅 마나스(Manas)와 그의 아들 세메테이(Semetei), 손자 세이텍(Seitek)에 이르는 3대 전사들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있는 영웅전이다. 마나스 서사시는 전체 길이가 50만줄을 넘을 정도로 방대한 이야기로써 19세기에 채록되어 문자화되기 전까지 주로 구전되어 전승되어 온 서사시다. 마나스 서사시를 외워서 재현하는 사람들을 ‘마나스치(manaschy)’라고 하며, 이들은 특별한 재능과 영적으로 선택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어 키르기즈 사회에서 높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다. 마나스치 중에는 5일에 걸쳐 111시간동안 끊임없이 전체 서사시를 암송하여 공연한 기록을 세운 분(Doolot Sydykov)도 있다. 마나스치들 마다 기억이 다르고, 때론 신접(神接)한 상태에서 무의식 속에 낭송되다보니 65개 이상의 다른 버전이 혼재하고 그 내용이 서로 상충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마나스 서사시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마나스, 제2부는 그의 아들인 세메테이, 그리고 제3부는 마나스의 손자인 세이텍에 관한 설화로 대략 다음과 같은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마나스 스토리
옛날 옛적 키리기즈 민족이 알타이 산맥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많은 가축을 가진 부자인 족장 자쿱(Jakyp)은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며 하늘에 간구한다. 다행히 그 기도가 응답되어 아들을 얻게 되었다. 마나스로 이름 붙여진 그 아들은 같은 날 태어난 숫말인 토루차르(Toruchaar)와 친구가 되어 유목민의 용맹한 전사로 성장한다. 마나스는 어려서부터 출중하였다. 키리기즈족을 괴롭히고 침탈하던 몽골계 오이라트족은 마나스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나 마나스는 그 계략을 벗어나고 40개 부족으로 갈라져 있던 키르기즈 민족을 단합시켜서 오이라트족을 물리친다. 마나스는 키르기즈족을 이끌고 그들의 조상들의 땅인 따뜻하고 비옥한 천산산맥 아래로 이주하여 정착한다. 제2부에서 마나스 사후 키르기즈족은 다시 내분에 휩싸인다. 사마르칸드의 왕족의 딸이었던 마나스의 아내 카누케이(Kanykei)는 내전의 위험을 피해 아들 세메테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피한다. 세메테이는 그가 마나스의 아들인 줄 모르고 지냈으나, 장성한 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키르기즈 민족을 통일하기로 굳게 다짐하고 천산지역으로 돌아와서 그의 유산을 요구하고, 민족의 단합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어느 날 부족을 떠나 홀연히 사라진다. 제3부는 마나스의 손자임을 모르고 적대적인 부족의 수중에서 자란 세이텍이 성인이 되어 이 사실을 인지한 후 그의 적과 싸우고, 키르기즈 부족을 다시 한번 단합시켜서 평화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나스, 민족의 정체성
마나스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구전되는 동안 키르기즈인들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독립적이고 평화로운 나라 수립에 관한 민족적 염원이 담긴 영웅전으로 승화되었다. 독립 후 키르기즈공화국은 마나스 장군을 국가 정체성의 상징으로 추존하고, 1995년에 마나스 탄생 1,0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지금도 비슈케크시의 중심인 알라투 광장을 비롯, 주요 도시의 요지에는 마나스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서 민족의 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다. 1930년대 소비에트연방에서 ‘카라-키르기즈 자치도(Kara Kyrgyz Autonomous Oblast)’의 경계를 설정할 때 키르기즈 민족을 대표하여 소비에트 공산당 중앙회의에 참석했던 후일의 초대 수상 주셉 압드라크마노프(Jusup Abdrakhmanov, 1901-1937)는 “키르기즈스탄의 영토를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느냐?”는 스탈린의 질문에 “마나스 서사시를 읊고 즐기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 키르기즈스탄이오!”라고 대답하여 오늘날의 영토를 확정지었다고 한다. 그만큼 마나스 서사시는 키르기즈인들의 역사와 가슴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신화 혹은 역사적 사실
그런데 마나스 서사시를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마나스가 알타이 산록에서 태어났다고 주장되는 950년은 이미 100여년 전에 키르기즈 민족이 알타이산맥을 떠나 천산의 지맥인 일리산맥 북쪽의 제티수 평원에 정착하고 있던 시절이다. 둘째, 마나스 서사시에서 키르기즈 민족을 괴롭히는 몽골계 오이라트족이 발흥하는 시기는 10세기가 아니다. 오이라트족은 13세기에야 몽골 서부지역에 정착했고, 15세기 초에 발흥하기 시작한 민족이다. 키르기즈족은 몽골제국의 전성기인 12-13세기에 이미 천산기슭으로 정착지를 옮긴 상태에서 15세기 중반 오이라트족인 에센칸(1407-1455)의 압제를 피해 더 남쪽으로, 더 고지대로 정착지를 옮겨 살게 되었다. 셋째, 일부 버전에서는 마나스가 키르기즈 전사들을 이끌고 북경까지 점령하는 통쾌한 서사가 읊어지고 있으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가장 비슷한 역사적 사실은 1449년 명나라 황제 영종 정통제가 북벌전쟁 중 오이라트족(이 때는 北元이라고 칭함)에 의해 생포되었던 ‘토목지변(土木之變)’이다. 즉, 키르기즈가 아니라 키르기즈의 적인 오이라트가 북경 점령 일보 직전까지 이루어 냈던 것이다. 마나스 서사시에서 낭송되는 북경 점령 장면은 아마도 840년 키르기즈족의 족장 아레칸이 위구르제국의 수도인 오르도-발룩(Ordo-Balyk)을 점령했던 사실을 10세기 말 북경 점령으로 치환하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만들어진 역사?
따라서 마나스 서사시는 아마도 15-16세기 키르기즈 민족의 시련기에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집단적 방어기제로 등장한 애국적 문학작품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마치 조선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직후, 구겨진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사회심리 속에서 ‘사명대사전’이나 ‘박씨전’이 저술되어 널리 읽혔던 것처럼... 혹은 16세기 초 키르기즈 민족의 에미르로 등극했던 ‘모하메드 키르기즈’의 애국적 행동을 아쉬워하는 어느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그를 마나스란 이름의 주인공으로 개칭하여 구전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400여년이 지나서 키르기즈공화국 정부가 이를 1,000년 전의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켜 발표한 것은 아닐까 추론해 본다.
영웅숭배론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겐 영웅이 있다. 아니 우리네 유약한 인간들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인(超人)의 존재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영웅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 업적이 부풀려지고, 더욱 정교한 스토리로 다듬어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인들도, 미국인들도 그러하고 키르기즈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마나스는 사실과 전설이 혼합된 서사시고, “영웅은 태어나는 것인가? 혹은 만들어지는 것인가?”란 논란의 경계선 상에 서있는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로 1950년대 소비에트 시절에는 모스크바 중앙당의 선전부장인 안드레이 즈다노프(Andrei Zhdanov)가 마나스 서사시를 '부르주아 범세계주의(bourgeois cosmopolitanism)'적 작품이라고 폄하하면서 그 활동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키르기즈스탄의 서쪽 도시 탈라스에 있는 건물 외벽에 “에미르 아부카의 딸인 가장 유명한 여인 케니젝 카툰에게 헌정한다”라고 분명히 새겨져 있음에도 이 건물이 실제로는 마나스의 무덤이라고 주장되고, 실제로 수많은 키르기즈인들이 이를 믿고 경건하게 참배드리고 있다. 700만 서융(西戎) 민족이 존숭하고, 그 역사적 실재를 믿고 있는 마당에, 어찌 아마추어 역사학자인 일개 동이(東夷)족 서생이 그 실존을 부인할 수 있으리오? 성경에서도 “믿음은 바라는 바의 실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마나스의 나라, 키르기즈스탄
아무튼 서사시 마나스는 키르기즈 민족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이다. 마나스 서사시는 키르기즈인들에겐 단순한 위인 숭배의 표현양식을 넘어서는, 거의 신앙적 수준의 교범이 되어 왔다. 세계 여러 나라에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는 영웅들의 서사시가 있다. 예를 들면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길가메시(Gilgamesh), 인도의 마하바라타(Mahabharata), 라마야나(Ramayana), 그리스의 일리아드(Iliad), 오디세이(Odyssey), 투르크메니스탄의 고로글리(Gorogly), 야쿠트공화국의 올롱코(Olonkho) 등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구전 서사시의 전설적인 주인공을 국가의 표상으로 추앙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런 면에서 키르기즈 민족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고, 따라서 키르기즈스탄은 마나스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