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초원의 복잡계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
키르기즈스탄의 역사를 탐구하다보면 이상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정작 키르기즈인들도 자기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온 왕조들과 벌어졌던 사건들을 제3자적 입장에서 멀뚱하게 바라본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이 땅의 역사와 민족간의 시차(時差)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만년 우리나라의 역사는 민족과 땅이 달리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는 수천년 인디언의 역사는 도외시한 채, 250년 합중국의 역사만 부각시키고 있다. 비슷한 현상을 이 곳 키르기즈스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천산산맥의 동쪽 땅인 타림분지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포함하는 건조사막지대인 반면, 천산산맥의 서쪽 땅은 비옥한 청정지대로 예로부터 중국에서 정결한 피안의 세계를 뜻하는 상상 속의 ‘서방정토(西方淨土)’ 혹은 서역(西域)으로 불려왔다. 이 땅에는 수만년동안 수없이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할거하고 살아왔지만, 현재 이 땅의 주인인 키르기즈 민족이 살아 온 역사는 기껏해야 1,200여년에 불과하다. 더욱이 키르기즈 민족이 수립했던 국가의 역사는 사실상 35년일 뿐이다.
키르기즈스탄; 땅의 역사
현재의 키르기즈스탄을 포함한 광대한 서북부 유라시아 스텝지역은 중국의 문헌상 천산산맥 너머 서역(西域)지역, 즉 서쪽 오랑캐인 서융(西戎)이 사는 지역으로 통칭하여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이 땅은 중국 감숙성 일대에 살던 월지(月氏)족이 북쪽 유목민족인 흉노(匈奴)의 침입을 받자 서쪽으로 이동하여 살고 있다가, 기원전 3-4세기경 흉노(匈奴)가 융성하면서 이 곳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후 선비(鮮卑)-유연(柔然)을 거쳐 기원 후 6세기경 돌궐(突厥)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유목제국의 지배형태는 중앙집권적인 구조가 아니었기에 국지적으로 대완(大捥), 오손(烏孫), 강거(康居), 격곤(鬲昆) 같은 수십개의 부족국가들이 혼재해 있었다. 또한 한(漢)나라의 서역정벌로 일정 기간 한나라의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629년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향하던 27살의 현장(玄奘)법사(602-664)는 <대당서역기>에서 오늘날의 키르기즈스탄 지역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 산길을 400여리 가다보면 대청지(大淸池, 이시쿨 호수)에 이르게 된다. 둘레는 천여리에 달하는데 동서는 길고, 남북으로는 좁다. 서북쪽으로 500여리를 가다보면 소엽수성(素葉水城, 토크목)에 이른다. 소엽수성에서 400여리를 가다보면 천천(千泉, 현재의 비슈케크 인근)에 이른다. 천천은 그 땅이 사방 200여리에 달하는데 남쪽으로는 설산을 바라보고 다른 3면은 평지에 접하고 있다. 그 땅은 물이 많아서 비옥하고, 숲은 울창하여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퍼져있다. 돌궐의 카간이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오는데 그 속에는 사슴 때들도 있었다...”
744년, 위구르족이 발흥하여 동돌궐을 물리치고 새로운 막북(漠北) 초원의 패자로 등장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의 후예인 안서도호부 대장군 고선지를 출정시켜 서돌궐이 차지하고 있던 천산산맥 서쪽지역을 정벌하기 시작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그드왕국(栗特國,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 제국인 아바스왕조에 도움을 요청하고, 아바스왕조는 호라산(북부 이란) 총독부 소속 장군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파견하여 고선지에게 대항한다. 751년 양군은 탈라스강 유역 아틀라(Atlah)에서 접전하나 당의 우군이었던 카를루크(Qarluq, 葛邏祿)족의 배신으로 후방진영이 급습 당하면서 10만명의 당나라 군대가 패퇴한다. 이후 카를루크는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여 발라사군(오늘날 키르기즈스탄의 토크목)에 도읍을 정하고 투르크멘(Turkmen)이란 국가명칭을 사용하면서 12세기까지 서역의 중심국가로 존속하게 된다. 그 지도자는 카라한 (Kara Khan; 검은 혹은 위대한 왕)이라고 불렸다. 한편, 천산산맥 동북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위구르는 757년 ‘안록산의 난’으로 당나라가 큰 위기를 겪을 때, 군대를 파견하여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빼앗겼던 수도 장안(오늘날의 시안)를 탈환시켜준다. 그 와중에서 위구르 군대는 장안을 약탈하고 당나라로부터 조공까지 받는 유라시아 대륙의 패자가 된다. 그러나 830년경 전염병이 창궐하여 국력이 약화되었고, 궁정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소란스럽던 840년 북쪽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키르기즈인들의 공격으로 나라를 잃게 된다.
이후 이 땅은 투르크멘, 즉 카라한 칸국(840-1212)의 영토가 되었다. 1125년 남송과 더불어 중국의 지배왕조가 되어있던 거란족의 요(遙)나라가 여진족 금(金)나라와 송(宋)나라의 협공으로 멸망하게 되자, 요나라 왕손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피신하여 1132년 동카라칸국을 멸망시키고 발라사군(八喇沙袞, 후일에 ‘후시오르데’로 개칭)에 도읍을 정한 후 국호를 서요(西遼, Kara Kitai/Kitan)로 선포한다. 서요는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아랄해까지 지경이 확대되었으나 1218년 몽골에 의해 멸망한다. 1260년에는 대칸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칸과 계승경쟁을 벌인 아리크부카칸이 서쪽으로 도망쳐서 발라사군에 웅거하다가 패퇴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1227년 징키스칸 사후 몽골제국이 분열되면서 발족된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로 남아있다가, 1370년 티무르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티무르 사후에는 차가타이 칸국의 후예들이 수립한 모굴리스탄(Moghulistan, 1462-1705) 등 여러 유목민족들이 발흥하여 각축전을 벌인다. 1638년 서몽골 오이라트계 유목민족인 준가르(準噶爾) 칸국이 이 일대를 장악한다. 마지막 유목민 제국인 준가르는 1755년 청 건륭제의 군대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현재의 키르기즈스탄 지역은 18세기 초 페르가나 지방에서 발흥한 코칸트 칸국이 일시 점거하나, 1850년대부터는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남진이 시작되었고, 1862년 러시아는 코칸트 칸국으로부터 토크목과 피시페크(오늘날의 비슈케크)를 빼앗고, 1864년 청(淸)나라와 ‘타르바가티 조약’을 통해 카자흐스탄의 발하시 호수와 키르기즈스탄의 이시쿨 호수를 포함하는 일대의 땅을 차지한다. 1875년 러시아 투르키스탄 총독인 콘스탄틴(Konstantin Petrovich von Kaufmann)이 코칸트 칸국을 멸망시킨다. 이후 러시아는 1881년 청나라와 ‘일리 조약’을 통해 중앙아시아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정짓고, 중앙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방대한 지역을 ‘투르키스탄’으로 부르며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키르기즈스탄; 민족의 역사
키르기즈 민족은 원래 알타이 산맥 북쪽 사면의 예니세이강 상류 지역(현재의 동시베리아)에서 수렵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에 쓰여진 사마천의 <사기(史記)>이며, 키르기즈인들의 나라가 ‘격곤(鬲昆)’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6세기경 자치왕국을 수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그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9세기 위구르제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중국 역사서 속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20세기에 러시아의 미누신스크에서 발견된 비석을 해독해 본 결과 709년 키리기즈 족장인 바르스벡(Barsbek)이 당(唐)나라의 종용으로 돌궐을 협공하기로 약속하나, 동돌궐의 카간인 카파간(Kapagan)이 이를 간파하고 군대를 보내 711년 숭가강 전투에서 패퇴하고 전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744년 동돌궐이 위구르족에게 멸망된다. 758년 위구르족은 키르기즈 영토를 침탈하여 속국으로 지배한다. 이후 키르기즈족은 끊임없이 독립 투쟁을 벌이고, 820년 독립왕국을 선포한 후 10만명의 대군을 양성한다. 드디어 위구르에게 속국이 된지 82년만인 서기 840년 키르기즈족은 ‘아레(阿熱)칸’의 지휘하에 위구르의 수도인 오르도-발룩(Ordo-Balyk)을 점령하여 위구르제국을 멸망시키고 정략결혼으로 위구르 왕실에 시집보냈던 ‘태화(太和, Taihe)공주’를 구출하여 당(唐) 황실로 되돌려 보낸다. 843년에는 동북 중앙아시아 일대를 평정하여 평화적 기반을 구축한다. 840년부터 925년까지를 일부 학자들은 ‘키르기즈 패권기(The Kyrgyz Great Power)’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때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키르기즈족은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광활한 영토 전체를 영구장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철수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인 북쪽 예니세이강 유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들의 옛 조상의 땅이었다고 일컬어지던)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발하시(Balkhash)호수와 천산산맥의 지맥인 일리(Ili)산맥 사이의 7개의 강이 흐르는 풍요로운 ‘제티수(Jetisu, 七水)’ 지역에서 유목민족으로 살아간다. 제국경영보다는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존속하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 특이한 민족이었고, 탐욕과 번영 대신 자유와 평화를 선택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족이동, ‘자유를 향한 여정’이었다. 이 때부터 중앙아시아에 키르기즈족이 정주하여 살게 되었고, 당시에 이주하지 않고 남았던 일부 부족들인 ‘예니세이 키르기즈인’은 지금도 러시아의 하카시아(Khakassia) 자치공화국에 6-7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이들은 제정 러시아 시절에 유배되었거나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건너 온 러시아인들에 의해 집단학살도 당했지만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며 민족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키르기즈인들의 중앙아시아 거주 역사는 840년 이래 현재까지 기껏해야 1,200년에 불과한 셈이다. 840년 이전의 이 땅에서 벌어진 역사는 땅의 역사이지, 민족의 역사가 아니었고, 그 이후에도 키르기즈 민족은 고산지대의 산악부족으로 살아가면서 현재의 땅에서 벌어지는 왕조들의 흥망성쇠와는 비교적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소수민족에게 강대국들의 손길은 매서웠다. 13세기 초, 몽골제국의 발흥과 서역진출로 키르기즈인들은 오늘날의 키르기즈스탄 동북부지방으로 더욱 남하하여 알타이산맥 북쪽에 남아있던 원래의 ‘예니세이 키르기즈인’들과의 연계가 영원히 단절된다. 15세기 몽골계인 오이라트연방의 에센칸 집권기(1438-1454)에는 압제와 살륙을 피해 더욱 험준한 남부 고지대로 피신해서 살아야만 했다. 1508년에는 ‘모하메드 키르기즈’가 40개 부족의 대부분을 통합하여 ‘키르기즈 연방령(領, ulus)’을 만들고 그 자신이 벡(Bek). 즉 에미르(Emir)로 칭한다. 그러나 모굴리스탄의 칸인 사이드가 그를 생포하여 오랫동안 감옥에 투옥한 후 처형한다. 이후 키르기즈인들은 카자흐족과 동맹을 맺어 산악지역에 할거하면서 오랫동안 모굴리스탄의 침략에 저항한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몽골계 오이라트족의 중가르제국이 유라시아 대륙 중앙의 패권국으로 등장하면서 키르기즈 민족의 독립왕국 건설의 꿈은 수포로 되어버린다. 19세기 후반 열강들의 영토할양과 원주민 탄압의 시기에는 상당수의 키르기즈인들이 파미르고원과 아프카니스탄으로 이주하였다. 20세기 들어서도 키르기즈 민족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 중앙아시아인들을 병사로 징집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대러항쟁 시기에 수십만명의 키르기즈인들이 학살당하고, 수십만명이 천산산맥을 넘어 중국 땅으로 피신해서 현재까지도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키르기즈에서는 이 사건을 우르쿤(Urkun), 즉 ‘대탈출’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16년의 사건으로 약 40%의 키르기즈인들이 학살되거나 이주/실종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렇듯 1,200여년 전 알타이산맥에서 천산산맥으로 수천 ㎞를 이동한 키르기즈 민족의 ‘자유와 풍요를 위한 여정’은 ‘피와 땀과 고난의 여정’이 되었고,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그 결실을 얻게 되었다.
키르기즈 인종
그렇다면 키르기즈 민족은 어떤 사람들인가? 중국의 기록에서는 키르기즈인들을 선비족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회골전(回鶻傳)>에 묘사된 것을 보면 “키르기즈인들은 모두 키와 덩치가 컸으며(人皆長大), 붉은 머리털(赤髮), 하얀 피부(晳面), 푸른 눈동자(綠瞳)를 갖고 있었고, 검은 머리칼은 거의 없었다. 그 중에서 눈동자가 검으면 반드시 ‘이릉’의 후예라고 했다”란 대목이 있다. 여기서 이릉(李陵, ?-BC 74)은 중국 한무제 당시 흉노와의 전투에 투입된 한족 장군이었으나, 포로로 붙잡인 후 흉노의 조정에 협조하여 고관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이후 수(隨)나라와 당(唐)나라를 창건한 선비족들이 이릉의 조부인 이광(李廣, 184-119 BC)의 먼 후예였기에 두 왕조의 황실에서는 키르기즈족을 친척민족으로 우대하였다고 한다. 후한서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고대 키르기즈인들은 인종적으로 몽골이나 터키인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이들은 이후 남쪽지방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민족, 특히 투르크계와 섞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1세기에 쓰여진 <신당서(新唐書)>에는 키르기즈인들을 ”그 문자와 말은 위구르인들과 동일(其文字言語與回鶻正同)”하고, “키르기즈인들이 돌궐의 여인들을 처자로 맞는 것을 좋아한다(突厥以女妻其酋豪)”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키르기즈인들은 딩링(Dingling)족과도 통혼한다(其種雜丁零)”라는 문구도 있다. 840년 위구르제국을 멸망시킨 ‘아레(阿熱)칸’도 어머니는 돌궐족이었고, 그 부인은 카를루크(Qualug)사람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8세기 이후에는 러시아의 진출로 더욱 다양한 인종적 특성이 섞인 민족으로 진화되었다.
오늘날 키르기즈스탄에는 80개 이상의 인종이 살아가고 있다. 2025년 현재의 인종구성은 키르기즈인 77.8%, 우즈벡인 14.2%, 러시아인 3.8%, 둥간, 타지크, 위구르, 고려인 등 포함 기타 4.2%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1959년 센서스에서는 키르기즈인의 비중은 40.5%에 불과했고, 러시아인의 비중이 30.2%였다. 독립과 더불어 러시아인과 독일인 등 유럽인들이 자기네 나라로 대거 귀국한 반면 키르기즈인들의 출산율이 증가하여 키르기즈공화국은 키르기즈인들의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인구구조의 변화는 도시인구에서 더욱 특징적으로 발견된다. 독립 이전에는 대다수의 키르기즈인들은 농촌/산악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독립 직전인 1989년 마지막 실시된 인구조사에서 수도인 프룬제(현재의 비슈케크)시의 인구는 60% 이상이 러시아, 우크라이나인 등 슬라브계였고, 거의 10%가 유대인들이었던 반면, 키르기즈인들의 비중은 22%에 불과했었다.
키르기즈스탄: 국가의 역사
키르기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나라 중 하나다. 이 말은 불과 35년전인 1991년에 소비에트연방(USSR)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독립된 나라의 형태를 가져 본 기록이 별로 없는 완전히 새로 탄생된 나라에 가깝다는 말이다. 물론 키르기즈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펄쩍 뛰는 사람들도 있다. (초대 대통령인 Askar Akayev 집권기에는 마나스 장군 탄생 1,000년, 키르기즈 민족 발원 2,200년, 오쉬시 창시 3,000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키르기즈 민족이 독립된 국가나 왕국을 결성했던 역사적 사실(史實)은 간헐적으로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키르기즈 민족의 정체성이 어느 시기에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도 확실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1916년의 대러항쟁기를 지난 후,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등장한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USSR)’은 소수민족 유화책의 일환으로 1924년 현재의 키르기즈스탄 지역을 ‘카라-키르기즈 자치도(Kara-Kyrgyz Autonomous Oblast: KAO)’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도지사는 러시아인이 임명되었다. 1926년에야 이를 '키르기즈 소비에트 자치공화국(Kyrgyz Autonomous Soviet Socialist Republic)'으로 재편하고, 키르기즈인인 Yusup Abdrakhmanov를 초대 수상으로 임명한다. 이 때 키르기즈 민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국가적 자치체제를 경험하게 된다. 1936년에는 이를 ‘키르기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Kyrgyz Soviet Socialist Republic)’으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키르기즈 민족은 역사상 최초의 국가를 갖게 된다. 그것이 1991년 수립된 현재의 ‘키르기즈공화국’이다. 1991년 3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는 88.7%의 국민들이 소비에트 유니온(USSR) 소속 공화국으로 잔류하길 희망했으나, 민족주의자들의 주도하에 1991년 8월 31일 독립이 선포되고, Askar Akayev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2년 UN에 가입하였다.
이렇게 보면 키르기즈스탄은 길어봐야 100년의 자치 경험, 짧게 보면 35년의 독립국가의 경험을 갖고 있는 신생국인 셈이다. 그러나 키르기즈 민족의 독립국가로서의 흔적은 몇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마나스 장군의 전설이고, 또 다른 예들은 16세기의 모하메드 칸(1470-1533), 19세기 말 실존했던 현대 키르기즈 최초이자 마지막 왕인 오르몬(Ormon)칸(1792-1854)과 ‘산악의 여왕’ 쿠르만잔 다트카의 경우다.
---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글 “키르기즈스탄의 영웅과 그들의 고향”에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