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의 정원

키르기즈스탄으로

by 천산산인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에 있는게야?”

모집 광고를 보고 든 첫 번째 생각이었다. 그리고 보니 몇 해 전 유튜브 동영상에서 ‘처녀 납치혼(Ala Kachuu)’의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살아났다. 어마어마하게 후진국이고, 봉건적이다 못해 야만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도 코로나 기간동안 몇 년을 제주도에서 피둥피둥 신선놀음하며 지내다가 마누라 등쌀에 밀려나온 처지인데다가, 경제학자가 지원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후진국 사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고, 적응력이 있다고 자부했던 터이기에 KOICA 파견 자문관으로 키르기즈스탄에 오게 되었다.

2024년 1월 23일 새벽 01시 30분

두어시간 지연된 비행기가 비슈케크 마나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사방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농무(濃霧) 속으로 밀도 짙은 연탄가스 냄새가 배어났다. 마중 나온 KOICA 현지직원 아이잣 대리의 밝은 목소리, 유창한 한국어 환영인사에 몽롱했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그렇게 내 키르기즈스탄 여정이 시작되었다. 공항청사를 벗어나자 차량 전조등 너머로 희뿌연 안개를 뚫고 하얀 밑둥의 백양목 가로수들이 훤칠하게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창문에 얼굴을 대고 바라보니 가지 위론 백설이 쌓여있어서 겨울왕국의 정취가 물씬하다. 도심으로 향하는 길도 약간씩 울퉁거렸으나 내가 상상했던 최빈국의 도로보다는 훨씬 훌륭했다. 차라리 선진국의 공항 고속도로에 가까웠다.

야생화 천국, 천고마비(天高馬肥)의 나라

대부분의 키르기즈의 산들은 헐벗어 있다. 토사와 사암지형이라서 울퉁불퉁한 속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처음에는 나무도 잘 자라지 않는 이 땅이 너무 척박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봄이 왔다. 아니 이럴수가!! 온천지가 녹색으로 뒤덮이고 수백만평의 고원 능선 위로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너머 들판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 위로 만년설의 준봉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다. 이 나라는 야생화의 천국이다. 특히 서울의 7배 크기로 고도 2,500m에서 4,000m에 펼쳐진 수사무르(Suusamyr) 고원지대 같은 곳을 가보면 이건 인간세상이 아니다. 우리 식구는 5월 하순 비슈케크 뒷산인 Boz-Boltok 고원에 갔음에도 수백만평에 만발한 양귀비 꽃밭과 그 위로 펼쳐진 설산의 절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영화 Sound of Music의 첫 장면에서 말괄량이 수녀 마리아(July Andrews 출연)가 빙글빙글 돌면서 부르던 노래 “The hills are alive with the sound of music”의 장면이 절로 떠올랐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아름다운 황홀한 풍광이었다.

여름이 되어 (이 나라는 고도도 높고, 길도 험하여 일반인 대상 관광은 4월-10월에만 가능하다.) 이 나라의 명승지를 방문할 수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산봉우리에 만년설이 쌓여있고, 그 눈이 녹은 새파란 물이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뿜으며 계곡을 꽉 채운 채 힘차게 흘러내리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그 계곡을 따라 하늘 높이 솟은 수십길의 가문비나무들이 좌우 협곡에 가득하여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장면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그 계곡을 향해 가는 길은 대부분 넓은 초원지대이고, 소, 말, 양같은 가축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고, 저 편으로 전통가옥인 하얀 유르타 몇채가 점점이 놓여있는 목가적인 풍광이었다. 그 초원을 걷거나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높은 설산을 바라보는 정취는 그야말로 선계(仙界)를 거니는 것이 이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신의 정원,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

키르기즈스탄에는 높은 산이 즐비하다. 7,000m급 산이 3개가 있다. 3,000m 이상 봉우리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우리나라의 산은 봉우리마다 이름이 있고, 전설이 서려 있지만, 이 나라는 대부분의 봉우리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기에 별도의 이름도 붙여 있지 않다. 산이 높은 만큼 계곡도 깊고, 에메랄드빛의 아름다운 산중호수도 즐비하다. 대략 2,000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높은 산들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 근처까지 가서 원경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하다. 그래서 키르기즈스탄을 일컬어 ‘신의 정원’이라고 한다. 이 나라에서는 이런 전설로 표현하고 있었다. 옛날 조물주가 천지를 창조하고 모든 민족, 족속들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키르기즈 민족이 뒤늦게 나타나서 땅을 달라고 하자, 난감해진 조물주께서 “남아 있는 땅이라곤 내가 정원으로 쓰려던 땅밖에 없는데 할 수 없구나. 너희들이 쓰거라”해서 받은 땅이 현재의 키르기즈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첫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광활한 초지에 가축들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좋은 우유가 풍부하고, 야생화 들판에서 벌들이 모아온 품질 좋은 각종 꿀들이 풍성한 곳이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가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가나안 지방이 아니고, 이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 키르기즈스탄은 네팔과 스위스 그리고 몽골을 합쳐 놓은 땅이다. 즉, 히말라야만큼 높진 않으나 더 푸르른 나라이고, 스위스만큼 아름답진 않으나 더 우뚝한 나라이며, 몽골만큼 광활하진 않으나 더 아름다운 나라인 것 같다.

이렇게 늙은 노인이 멋모르고 우연히 찾아온 땅이 이 멋진 나라, 키르기즈스탄이었다.

여기 후진국 맞아?

키르기즈스탄은 통계상으로 비견해 보는 엇부른 상상력을 뛰어넘는 나라다. 2023년 통계로 2,000달러 미만의 1인당 국민소득은 동남아의 캄보디아나 라오스보다 적게 집계되고 있었지만 실제 도시의 생김새나 국민들의 삶은 훨씬 풍요로웠다. 수도 비슈케크는 격자형 도로망이 촘촘하게 깔려 있고, 군데군데 넓직한 공원이 자리잡은 친환경도시였다. 제정 러시아 시절,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유럽식 도시계획 개념에 따라 건설된 새로운 계획도시였다. 비슈케크에는 멋진 인테리어를 가진 유럽식 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하다. 차량도 어찌 많은지 비슈케크만 보면 120만 인구의 도시에 50만대의 차량이 등록되어 있어서 대략 인구 2명당 차량 1대 꼴로 운행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교통체증이 상시적이다. 비록 중고차일지언정 고급 브랜드의 차량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찬찬히 살펴 볼 때마다 국가의 시스템도 잘 정비되어 있고 치안도 잘 유지되고 있었다. 후진국에 만연한 비참한 슬럼가와 비정한 사창가도 이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지하방이나, 좁은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불어있는 불량주택들도 이 나라엔 없다. 엇부른 개발경제학자인 내가 이해하는 후진국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많이 다른 나라다.

우리보다 선진적인 관습과 문화

키르기즈스탄에선 근대화 과정에서 소련연방의 공화국으로 유럽식 문물을 받아드려서인지, 다인종사회가 갖는 문화적 관용성이 높은 것인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의 제도나 관행보다 선진적인 면을 발견하곤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구역 별로 길거리 청소를 하는 청소부들이 많고, 모두들 단정하게 유니폼을 착용한 채 열심히 비질을 한다. 모든 식당에 메뉴판이 잘 구비되어 손님 1인당 메뉴판 1개씩을 가져다주고 선택하게 한다. 식당 종업원들도 모두 유니폼을 입고 있고, 대부분의 식당이 유럽의 전통적인 서빙 매너로 식사를 제공한다. 거의 모든 식당 및 공공장소에 cloak room이나 옷걸이가 구비되어 있어서 외투를 맡기거나 걸고 실내로 들어가게 한다. 어디에서나 개수가 아니라 무게로 정확하게 계량해서 셈을 하는 거래방식이다. 시내버스가 승하차 승객들을 배려하여 천천히 발차한다. 어른 공경문화가 살아있어서 버스 안에 노인이 있으면 젊은이들이 서로 벌떡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한다. 조직 내에서도 아랫사람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고, 비교적 의견을 경청하는 문화가 배어 있다. 공산주의에서 훈련된 것인지 공공질서 유지가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예를 들면 쓰레기 투척시간을 오후 6시 이후로 변경하자 낮에 쓰레기통에 투척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목민 특유의 문화인지 손님접대가 (지나치게!!) 후하다. 늦어져도 불평하지 않고 참고 기다려 준다. 한번은 단체관광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동행한 한국인분이 몸이 불편하여 2시간 이상 늦게 하산했는데도 단 한사람도 불평하지 않고 무사귀환을 축하해 주었다. 이슬람의 가르침을 따라서인지 길거리에서 동냥하는 분들에게 적선도 잘 한다. 그리고 물 한잔부터 버스표까지 QR코드로 지불하는 '현금없는 사회'를 만들어 살고 있다....


천국? 아니, 후진국

그렇다고 키르기즈스탄이 천국은 아니다. 선진국도 아니다. 도시는 가난과 오염이 가득하고, 시골은 황홀한 경치 속에 스며든 빈곤과 무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이 사회를 뒤덮고 있는 후진성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나라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 비슈케크는 지옥으로 변한다. 대기질이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나빠진다. 엄청나게 큰 분지이지만,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엄청나게 높다보니 생각보다 대기 순환이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날씨라도 약간 풀리는 날이면 수증기가 안개로 기화되면서 오염물질과 함께 피어올라서 때론 도시 전체가 새카맣게 암흑 속으로 잠기기도 한다. 대부분이 석탄난방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와 차량 배기가스로 도시 자체의 오염원이지만, 편서풍이 불어오는 도시 서쪽에 공업단지가 있어서 산업용 배기가스도 한몫 거들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와 국제기구의 지원으로 한 해가 다르게 공기질이 개선되고 있다곤 하나 아직도 비슈케크는 세계 도시 중 손꼽힐 정도로 대기질이 나쁜 개발도상국의 도시일 뿐이다.

정전(正傳) 그리고 새외별전(塞外別傳)

이렇게 상반된 모습의 나라이니 개발정책 자문관이 고민하고 생각해야할 일도 많았다. 게다가 처음에 배속 받았던 ‘민관협력(PPP)센터’는 실무부서이자 이권사업이 걸려 있는 기관이기에 외국인 정책 자문관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8개월 근무 후 소속부서를 ‘국가행정아카데미’란 곳으로 옯겼다. 두 기관 다 대통령실 직속기관이긴 하지만 그 성격은 매우 달랐다. 국가행정아카데미에선 좀더 자율적으로 국가발전의 장기구상을 고심해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9개월 동안 구상하고 집필해서 책 1권을 영어로 썼다. 키르기즈스탄의 대안적 장기발전전략에 관한 책, 『Change Lanes: Alternative Development Strategies for the Kyrgyz Republic (2025-2075)』이다. 여름 두달동안 수정-편집-번역 과정을 거쳐 2025년 9월초에 영어와 러시아어 합본으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9월부터 연말까지 각 부처와 대학을 다니며 31회의 특강을 실시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지식전수지만, 나는 후진국 공직자나 미래 지도자들에게 경제개발에 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오래 전부터 스스로를 DVD Salesman으로 자처하고 있다. ‘경제개발의 꿈과 비전(Dream and Vision of Development)을 파는 영업사원’


그리하여 저 정책보고서는 키르기즈스탄에서 내가 쓴 정전(正傳)이 되었고, 틈틈이 기록한 수필을 모은 이 책, “천산의 메아리”는 머나먼 서역 변방, 그 너머에 앉아서, 유라시아대륙 동쪽 끝에서 건너 온 한 노인이 기록한 새외별전(塞外別傳)이 되었다.


2026년 1월 6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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