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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환 Jan 01. 2019

4# 부(富)를 만드는 2가지 방법

청년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모두의 정치'

 2018년 4월, 당시 대한 항공사 전무이자 한진그룹 총수일가의 차녀인 조현민 씨는 공식회의석상에서 나이가 지긋한 임원들에게 반말과 폭언을 일삼고 광고기획사 직원에게 욕설과 물이든 컵을 집어던지는 등 상식 밖의 행동을 하여 국민적 공분을 산일이 있다. 국민들은 이 ‘물 컵 갑질’ 사건에 대해 엄벌에 처해달라는 국민청원을 냈고 정부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한진그룹 일가의 검찰 수사를 시작했다. 


 이 사건이 있기 4년 전 한진그룹 일가의 장녀인 조현아 씨가 이륙 준비 중이던 기내에서 땅콩 제공 서비스를 문제 삼으며 난동을 부린 이른바 ‘땅콩 회항사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전례가 있었고 같은 재벌일가의 자녀가 또다시 벌인 갑질 사건으로  한진그룹은 더욱 거센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한국은 이러한 기득권층의 갑질에 매우 민감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 사라진 기회의 평등이 자리하고 있다. 노력으로 신분상승이 가능한 사회는 그 자체로 기회의 평등이 존재하는 사회다. 하지만 지금은 계층 이동을 위한 사다리가 없어진 지 오래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변할 것 같지 않은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갑질을 보면서 적개심으로 표출된다. 


 기회의 평등은 부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기회의 평등으로 상징되던 사법시험의 폐지 그리고 공기업과 대기업 취업에 기득권층의 자녀가 이미 내정되어 있다는 언론보도는 국민들이 절망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기회평등이 실종되어서일까. 실제 통계 데이터 상으로도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상위 소득자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에 가까운 45%를 차지하고 나머지를 90%의 국민들이 나누고 있다. 그리고 이 상위 소득 10%에 속한 자녀들에게는 서민층에 속한 자녀들보다 훨씬 많은 기회가 부여되고 있으며 이미 너무나도 벌어진 출발선의 격차를 보통의 능력으로는 따라잡기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부를 쌓는 방법은 개인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 저축을 하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혹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껏 소득을 올리는 것은 마땅한데 무엇이 문제냐고 말하기도 한다. 개인이 능력껏 소득을 올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소득이 개인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수저 계급론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금수저로 태어난 이가 개인의 능력으로 부를 쌓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처럼 물려받은 것을 기회로 삼아 더 큰 부를 창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부모의 도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1,000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10억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이 더 큰 부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니까. 


 저축과 상속 중 누가 보더라도 더 빨리 부를 쌓을 수 있는 쪽은 상속이다. 결국 부의 불평등은 사유재산제와 재산의 되물림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사유재산제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경제가 어려운 시기엔 특히나 부의 불평등 문제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투자가 줄고 고용이 줄어드니 그만큼 기회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엔 개인의 능력으로 돈을 벌기 어려워지므로 상속으로 부를 쌓은 사람들을 보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이 사회가 불평등하게 느껴지곤 한다. 


 한국사회는 재벌 3세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 1세대 창업주와 2세에 대해선 존경을 표한다. 아무 기반 없이 빈손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1세대의 진정한 노력과 기업가정신을 경외하고 이를 함께 일군 2세에 대한 부분적 인정이다. 하지만 3세는 부의 축적 과정이 다르다. 온전한 상속이다.   

  

 세대를 거치며 부자만 더욱더 부자가 되는 사회, 사람들은 이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 사유재산제가 있기 때문이야말로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 전체가 부유해진다는 입장과 세대를 거친 부의 되물림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부모의 능력에 의한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빈곤한 계층에서 태어난 이들의 노력 의지를 꺾으므로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있다.     


 사적 소유를 인정함으로써 개인에게 부여되는 동기는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기에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고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 경쟁을 통해 사회는 더욱 발전한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매우 타당하며 긍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어떨까. 부를 쌓은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은 그 시작이 다르다. 


 본인의 능력이 아닌 부모의 후광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출발하는 불평등한 경쟁이 시작된다. 이러한 불평등은 결과적으로 소득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부의 차이는 교육기회의 차이를 만들고 교육정도에 따라 소득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해법도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르다. 


 보수는 결과적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을 강조한다.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선 사유재산제는 반드시 필요하므로 이를 바꾸기보단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경제적 해법을 모색한다. 바로 경제성장을 통한 기회 배분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고용이 늘고 그만큼 소득을 올릴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성장의 주체인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을 보장하고 기업으로부터 걷는 세금인 법인세를 감면하여 경제 활성을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지난 보수정권의 기조였던 이러한 친(親) 기업 정책은 생각만큼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주장 이론이 잘 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재벌의 이기심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부자감세를 해주었지만 대기업은 고용을 늘리지 않았고 사회적 투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부자만 더 부자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진보는 보수와 달리 결과적 평등을 위한 소득분배에 정책기조를 둔다. 그 핵심은 많이 버는 이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걷어 빈곤층에 돌려준다는 개념이다. 경제성장적 기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부의 불평등을 정부가 개입하여 완화하려는 취지다. 그래서 기업과 고소득자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고 그렇게 걷힌 세수를 복지나 정책 투자를 통해 고르게 분배하고자 한다. 이러한 진보의 정책은 반(反) 기업적 성격을 띤다. 기업 자율이 아닌 정부가 개입하여 기업에 강제를 하게 되므로 늘 기업의 반발이 있다.


 기업은 수요를 만드는 고용과 생산품의 공급이라는 두 분야의 경제적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다. 즉 기업이 바뀌지 않으면 해법이 없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선 재벌이 사실상 정부 위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을 다루는 방식이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르다. 기업을 달래어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인지, 아니면 법으로 강제하여 따르게 할 것 인지의 차이다. 이상적인 해법이라면 고용창출과 투자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끌어내면서 동시에 조세제도를 통해 소득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한다. 


 강제성 없는 기업주도의 경제성장과 적절한 분배정책이 그것이다. 이를 이론적으론 알고 있지만 실제 정책으로 이렇다 하게 성공을 거둔 적은 없다. 실제 정책을 입안하고 이에 적용을 받는 주체인 정부와 기업의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민심의 지지를 얻어야 하므로 늘 사회 여론 전면에 나서고 싶어 하고, 기업은 이윤창출이 목적이므로 사회적 책임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정부와 기업의 이상적인 역할은 ‘스크린 이론’을 통해 설명된다. 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에게 깊이 인식되는 것은 배우이지만 배우들의 열연 뒤에는 보이지 않는 스텝의 노력과 수고가 있다. 배우가 기업이라면 스텝은 정부다. 배우가 열연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하는 것이 스텝의 역할이며 스텝이 마련한 제반 여건 위에서 열연을 펼쳐야 하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다. 그저 보기엔 모든 영광이 배우에게 집중되는듯하지만 배우를 선정하고 지원할 수 있는 권한은 스텝에게 있다. 이러한 상황이 자칫 정경유착으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국가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미래가치가 있는 산업과 주요 기업에 정부가 투자와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역할의 경계가 분명해야 함에도 스텝 자신이 인기를 누리기 위해 전면에 나서면 배우와의 갈등만 증폭되며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정부는 기업이 성장하고 그 결과를 사회에 환원할 수 있도록 인기 있는 기업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업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주어야 하며 이후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대들이 지금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누구 덕분이며 그 영광을 누구와 나누겠소.’ 그런데 정부가 인기를 누리기 위해 기업에 악의 이미지를 씌우고 이를 처벌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쾌감을 주고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역할이다.


 자본주의의 무대에선 주연배우는 대기업이며 조연은 중소기업 그리고 스텝은 정부다. 기업이 스스로 사회적 책임을 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을 칭찬하고 이익도 보장해주어야 한다. 강제로 빼앗지 말고 스스로 내놓게 할 명분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스텝은 역할을 충분히 했고 그 덕분에 성공한 배우가 자신을 도와주고 사랑해준 스텝과 관객들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그때야 말로 사회적 책임을 들어 규제의 카드를 꺼낼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기업가 역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본받고 현재의 자산은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기업가가 회사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할수록 또 해당 기업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 사회의 민심과 정치 양상은 바뀐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하지 않기에 민심은 기업에 대해 적대적이 되고 민심을 등에 업어야만 집권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민심을 따라 기업 때리기에 나서며 결과적으로 기업은 상생이 아닌 국가와 민심에 반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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