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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환 Jan 01. 2019

5# 땀 흘리는 노동이 부끄러움이 된 시대

청년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모두의 정치'

 2018년 8월 통계청에서 조사한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청년실업률이 10%를 넘어섰다. 교육을 마치고도 자의든 타의든 일을 하지 않는 청년이 43만 명이란 얘기다. 청년실업통계는 15세부터 29세까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다. 청년만이 아닌 그 이상 연령대의 비경제활동인구를 모두 합치면 113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실업자가 4%, 고졸 실업자가 3.8%로 오히려 대졸 실업자수가 고졸 실업자보다 더 많다. 


 90년대만 하더라도 고학력이라고 생각되던 4년제 대졸자들의 실업률이 이 정도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학부를 마치고 바로 취업을 하기보단 대학원에 진학하는 비율도 눈에 띄게 늘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원을 나왔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하는 모습이다. 


 청년들의 실업률은 사회문제일까. 아니면 당사자들이 문제일까.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이 눈만 높아지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며 핀잔을 주곤 한다. 실제 대졸자들이 대기업을 선호하고 중소기업을 기피한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대기업에는 인재가 몰리지만 중소기업에는 구인난을 겪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기성세대의 청년에 대한 일침은 이러한 현실적 배경에서 나온다. 


 건설노동자들의 연령 비율만 보더라도 2040세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 건설 노동일을 하고 있는 연령대는 50세 이상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젊은 건설노동자는 임금이 낮은 외국인 노동자들로 대체되었다. 일을 할 순 있지만 점차 낮아지는 임금에 상실감을 갖고 기피하는 청년들에게 일을 하지 않는다며 꾸짖을 수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한 세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30년으로 본다. 사람이 태어나 교육을 마치고 일을 하며 결혼을 통해 자녀를 낳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과거 60년대 이후 취업을 하던 기성세대는 국가의 개발계획과 함께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요즘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 청년들의 최대의 목표이지만 과거만 하더라도 공무원은 거들떠보지 않던 직업이었다.    


 넘쳐나는 기업 일자리와 적정한 집값은 누구나 취업과 노동을 하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었고 다들 그렇게 살기에 사회적 위화감도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실제 사례를 필자의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필자는 일찍 이혼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택시운전을 하셨고 어린 필자는 어머니의 바로 윗 언니인 이모 내외의 손에서 7년간 자랐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이모 내외의 근검절약과 성실함이다. 이모부는 이렇다 할 고등교육을 받은 분은 아니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운전, 막노동 등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일을 하셨다. 이모부는 엄격하게 가정교육을 하셨다. 이모부 내외 사이에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모두 필자보다 한 살, 세 살 터울의 형들이었다. 우리 셋은 7년간 삼 형제로 지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틀린 문제 수만큼 이모부에게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맞곤 했다. 시험을 보고 난 후가 너무 두려워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많이 맞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교육 수준과 개인의 철학은 크게 연관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이모부가 그러하셨으니까. 이모부 못지않게 이모도 가계를 알뜰하게 챙기셨다. 이 시절 보고 배운 근검절약은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안 쓰는 가전제품의 전기코드는 반드시 뽑을 것, 치약은 몸통을 잘라서라도 끝까지 쓸 것, 더 이상 거품이 나지 않는 비누들을 모아 새롭게 비누로 만들어 쓸 것 등등 많은 것들이 어렸던 필자에게는 조기교육을 통해 마치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익숙해졌다. 그렇게 이모 내외는 결혼 후 10년이 채 되지 않아 번듯한 주택 집을 가지셨다. 비록 취업을 통한 일정한 수입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일하면 집을 살 수 있었음을 필자는 두 눈으로 보았고 두 형들 모두 명문대에 진학시킬 만큼 자식농사도 훌륭히 해내셨다.   

 

 이제는 평생을 모아도 살 수 없는 살인적인 집값과 줄어든 일자리로 청년들은 취업과 결혼 등 2중고를 겪고 있다. 3포 세대, 취업, 연애, 결혼을 포기한 청년들을 일컫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청년들을 3포 세대로 만들었을까. 


 사람은 희망이 없을 때 포기한다. 반대로 희망이 보일 때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행위로의 동기부여가 된다. 오늘의 청년들은 그런 희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하는 경제학자들이 있다. 정당한 노력으로 대변되는 노동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노력보단 부모를 잘 만나 쉽고 빠르게 부를 축적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면서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닐까.


 ‘백날 열심히 일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부모를 잘 만나는 게 제일이야’ ‘회사에서 열심히 하는 것보다 내 사업을 해야 해’ 요즘 청년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실로 맞는 말이다. 수십 년을 남의 일을 도와도 내 집 하나 가질 수 없는 현실과 똑같은 시간을 투자할 거라면 차라리 내 일을 해서 성공시키는 것이 훨씬 빠르게 부를 쌓을 수 있다는 너무나도 정확한 항변이다. 어차피 취업문은 좁고 설사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할 희망이 없기에 청년들은 3포 세대가 되어 버린다. 


 땀 흘리는 노동으로 돈을 버는 속도보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훨씬 빠른 시대, 이러한 현실에서 청년들은 땀 흘리는 노동을 부끄러워하고 외면한다. 이러한 오늘날의 현상은 경제학에선 이미 예견하고 있던 일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피케티는 ‘자본이 돈을 벌어들이는 자본수익률은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경제성장률보다 영원히 높다.’는 말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평등은 변하지 않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소수의 상속 엘리트들이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 이를 해소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을 주장한다.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상속에 대한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많은 상속세를 걷고, 막대한 불로소득을 취하는 이들로부터 높은 과세를 통해 걷힌 세수를 사회보장제도로 다시 사회에 환원하여 소득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조세제도개혁과 사회보장정책은 국가만이 실행 가능함으로 큰 정부가 불가피해진다. 


 반면 현세대든 기성세대든 한 집안에 축적된 부는 그들의 노력인데 국가가 나서 이것을 강제하고 빼앗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며 자본주의의 근간인 자유경쟁에 대한 동기를 약화시킬 것이므로 지나친 국가의 개입은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양측의 주장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한 세대의 노력에 대한 인정이다. 당사자 개인이 노력하여 쌓은 부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 부가 자녀에게 양도되는 것에 대해서는 양측의 시각이 다른 것이다. 


 풍요 속의 빈곤, 오늘날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설명한 말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는 먹을 것이 없고 입을 옷이 없어 걱정을 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들의 마음의 빈곤은 가시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정서적 차원의 문제이므로 사회정책을 탓하기보단 먼저 청년들의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노동은 부끄러운 것이 아닌 자랑스러운 일이다. 세상에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은 재화의 양이며 재화를 만드는 것은 자본만이 아닌 순수한 노동이 더해질 때 가능한 일이다. 노동이야말로 세상에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원천이며 모두가 그렇게 믿고 오늘도 땀 흘려 일한다. 다만 이러한 믿음을 배신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개선되어야 할 문제이다.     


 내가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이 그 기회를 열어준다. 그렇기에 자본주의는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불평등을 낳는 모순 그 자체다. 그 기회가 완벽한 것이라면 현재와 같은 불만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본주의는 과거의 신분제도를 새로운 형태로 바꾸었다. 조선시대까진 태어나면서 정해지던 사회적 신분은 아무리 애를 써도 바꿀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 안에서는 적어도 그러한 굴레는 없다. 다만 자본의 소유와 되물림에 의해 새로운 경제 계급을 형성했을 뿐이며 경제 계급은 개인이 가진 뛰어난 능력과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 출발점이 서로 다르기에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이제 문제와 해결 방향은 나와 있다. 되물림에 의한 경제 계급을 어떻게 하면 개선하고 정당한 노동으로 부를 쌓을 수 있는 사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많은 경제학자들은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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