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떨 때 ‘나’로 존재할까?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매번 달라진다. 가족같이 편한 친구 앞에서의 나와, 그저 인사만 나누는 사이의 친구 앞에서의 나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이 중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일까?
많은 사람들이 편한 친구 앞에서 나오는 행동이 더 진짜 나라고 믿는다. 거리낌 없이 웃고,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에서 '진짜 나'를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느낀다.
나는 오히려, 편한 사람일수록 더 조심하고, 더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편한 감정 뒤에는 '의존'이 숨어있고, 그 의존은 나를 약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너무 편해지는 순간, 나는 그에게 기대게 되고, 어쩌면 무언가를 바라고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래서 나는, 편한 사람이어도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다. 어쩌면 일부러. 그렇게 해야 관계가 오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고, 실망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이 믿음은 나를 보호해 주었지만, 동시에 소중한 친구 하나를 잃게 만들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너무나 편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상실 앞에서 자신을 탓하거나, 혹은 상대를 원망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도, 그 친구도 탓하지 않았다. 다만 그 친구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떠나보냈다.
물론,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단순한 추억으로만 남기기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현실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복잡하고 걷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 걸까?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라고 느낄 때, 비로소 진짜 나에 가까워지는지도 모른다. 확실하지 않기에 의심하고, 불안하기에 돌아보며, 모호하기에 계속해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그리고 그 질문을 붙잡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그 찰나에, 우리는 어렴풋이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1장 나는 왜 나를 모를까?
나는 어릴 적부터 ‘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를 이해하고자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거울 속 나는 매일 똑같이 생겼지만, 내 마음은 매일 달랐다. 하루는 용기 있고, 하루는 소심했고, 어떤 날은 밝고, 어떤 날은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달라지는 내가 과연 한 사람인가? 나는 정말 ‘하나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들은 말한다. “너 자신을 믿어.” “너는 너잖아.” “너만의 길을 가.” 하지만 그 말들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정작 ‘나’가 누구인지 몰랐으니까.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흔한 말이면서도, 가장 낯설고, 가장 멀리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고민이 별로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자연스러웠고, 나는 나대로 살아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타인의 기대를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나를 관찰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런 감정을 드러내도 괜찮을까?’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나를 감췄고, 가끔은 나를 부풀렸으며, 어떤 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했다. 타인에게 더 사랑받기 위해, 더 적응하기 위해,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나는 나를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진짜 나’와 멀어졌다.
우리는 왜 자신을 모르고 사는가?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모르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나를 직면하면,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외로운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대신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다.
어떤 사람은 직업에 자신을 투영한다. 어떤 사람은 연인, 가족, 친구와의 관계에 자신을 던져버린다. 어떤 사람은 자기 외모나 사회적 지위, 혹은 성과로 자신을 정의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것들이 무너지면, 결국 남는 건 텅 빈 자신이다. 그때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도대체 누구였지?”
우리 사회는 정체성을 빠르게 정리하고, 이름을 붙이고, 역할을 부여한다. 학생, 직장인, 엄마, 아빠, 연인, 친구, 리더, 팔로워. 이 모든 단어는 ‘나’를 설명하는 듯하지만, 사실 ‘나’를 감추는 데 익숙하다. 우리는 그 역할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틀에서 벗어나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그 역할이 없을 때도, 여전히 나일까?”
혼란은 시작이자 기회다
“나는 왜 나를 모를까?” 이 질문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만이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자신을 모른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실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혼란은 정체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변화의 전조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게 될수록, 우리는 자신이 아닌 것들부터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한다. 남이 기대한 내가 아니고, SNS에서 좋아요 많이 받은 모습도 아니고, 억지로 미소 지었던 날의 나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지워 나가다 보면, 마침내 “아, 이건 내가 아니었구나”라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 지점부터가 진짜 여정의 시작이다.
내가 나를 모른다는 건
내가 나를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아주 정직한 상태다. 자신에 대해 확신만 가득한 사람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훨씬 깊다. 그 질문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견디며 나아가는 사람만이 자기만의 언어, 자기만의 삶, 자기만의 진실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매일 나를 모른다. 어제의 나는 오늘과 다르고, 오늘의 나는 내일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혼란 속에 머무를 수 있다. 나를 알아가는 여정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자신을 알고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나처럼 아직도 자신을 알아가고 있는 중인가?
2장 나는 타인 안에서 살아간다.
나는 혼자 있을 때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더 분명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는 존재는 나 혼자일 때보다 누군가 앞에 섰을 때 더 또렷해진다. 그의 말투를 따라 하고, 그의 눈치를 보고, 그의 감정을 예상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조차, 상대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애써왔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느끼는 '나'는, 진짜 나일까? 아니면 타인의 반사광일 뿐일까?
나를 만든 것은 타인의 시선이었다
우리는 자아를 오롯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낸다고 믿지만, 실은 타인의 거울 속에서 자라왔다. “넌 참 착하구나.” “넌 왜 그렇게 예민해?” “넌 원래 그런 애잖아.”
이런 말들은 처음에는 단지 의견이었지만, 어느 순간 정체성처럼 나에게 들러붙었다. 나는 ‘착한 아이’로 불리면 계속 착해야 할 것 같았고, ‘예민하다’는 말 앞에선 내 감정을 억눌렀고, ‘넌 원래 그런 애잖아’라는 말에 갇혀 다른 가능성을 스스로 거부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이 기대하는 나’가 되었다.
타인의 감정이 나를 휘두를 때
나는 종종 다른 사람의 기분에 너무 쉽게 휩쓸린다. 그 사람이 화가 나 있으면 나도 불안해지고, 그 사람이 우울해 보이면 내가 뭔가 잘못했나 자책한다. 심지어 그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스스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반성한다.
이건 공감이 아니다. 자기 소멸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감정을 나눌 수 없다. 나는 타인의 기분을 내 책임처럼 받아들이고, 그러다 보니 내 감정은 점점 뒤로 밀려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지금 뭐가 불편한 거지?” “내가 뭘 느끼고 있는 거지?” 스스로조차 내 감정을 해석하지 못하게 된다.
타인에게서만 존재하는 나
연애를 할 때, 누군가의 친구로 있을 때, 학교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는 늘 누군가의 일부였다. 그 속에서는 나라는 존재보다, 역할이 더 중요했다. 연인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 친구가 필요로 하는 역할, 팀에서 기대받는 기능.
그 역할 속에서 나는 가끔 이렇게 느꼈다.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야.”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그 관계가 사라지면 내가 텅 빈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타인에게 맞춰 살아왔기 때문에, 타인이 없으면 나는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정말 나였던 적이 있었을까? 아니면 늘 누군가의 일부였던 적뿐이었을까?
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그러나 나는 거울이 아니다
타인은 우리에게 거울과도 같다. 그를 통해 우리는 나의 행동, 말투,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거울 없이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듯, 타인 없이는 나의 어떤 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진짜 거울처럼 여기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긴다. 거울 속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전부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럼 우리는 거울의 얼룩 하나에도 불안해지고, 거울이 나를 예쁘게 비춰주지 않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배워야 했다. 타인은 나의 거울일 수 있지만, 나는 거울이 아니란 걸. 나는 타인을 비추는 도구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빛나는 하나의 주체다.
관계 안에서도 나로 존재한다는 것
이제 나는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타인의 기분에 휩쓸리지 않기. 상대가 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기. 내 감정과 반응을 무시하지 않기.
관계 안에서도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건 때때로 거절하는 용기고, 침묵하는 용기고, 나의 진짜 마음을 말하는 용기다. 그리고 때로는, 나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연습이다.
타인 없이 나는 존재할 수 없지만, 타인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나는 이제 타인의 기대 속에서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로 살아가고 싶다.
“나는 타인 안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타인과 함께, 나로 살아가고 싶다.”
3장 감정은 나의 언어다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많다. 특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속이 답답한데 말은 막히고, 말이 막히니 감정은 더 뒤엉킨다. 그래서 나는 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뭘 느끼고 있는 거지?”
감정은 내 안의 첫 번째 언어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과 처음으로 소통한 건 언어가 아니라 감정이었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나는 울고, 웃고, 떨고, 외면했다. 그것은 모두 내가 나를 표현한 방식이었다. 감정은 가장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반응했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사람들은 말한다. “울지 마.” “화를 참아.” “그렇게 예민하면 안 돼.” 그 말들을 들으며 나는 점점 감정의 목소리를 억눌렀다. 감정은 점점 억제해야 할 것, 부끄러운 것, 감춰야 할 것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감정을 숨기고, 대신 논리와 도덕과 기준으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감정은 진실의 지도다
하지만 아무리 감정을 억누르려 해도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목이 메고, 가슴이 조이고, 속이 울렁거리는 순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지금 말은 안 하지만, 무언가 분명히 느끼고 있구나.”
감정은 내가 진짜 나에게로 향하는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 감정은 나를 통과해서 나온 언어이기에, 때로는 머리보다 정확하고, 말보다 진실하다. 감정을 무시하면 방향을 잃는다. 하지만 감정을 인정하면, 우리는 그 감정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라는 존재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감정은 나를 위한 말이다
나는 한동안 내 감정을 타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나를 무시해서, 누가 날 실망시켜서, 누가 나를 외롭게 만들어서. 하지만 감정은 타인을 향해 있는 것 같아도, 결국 나에 대한 메시지였다.
화는 내가 어디에서 선을 넘어섰는지를 알려주는 경계였고, 슬픔은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였으며, 외로움은 내가 나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감정은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을 뿐이다. 문제는 내가 그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정을 말하는 연습
나는 이제 내 감정을 말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서운해.” “나는 지금 무섭고, 혼란스러워.” “나는 지금 사랑받고 싶어.” 이런 말을 하는 건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 어쩌면 약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상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혹은 나조차 내 감정을 믿지 못할까 봐 두렵다.
하지만 감정을 말하기 시작한 순간, 나는 더 이상 모호하지 않다. 나는 더 이상 남의 말에만 휘둘리지 않는다. 감정을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과 연결된다.
감정을 언어로 만들기까지
감정은 충동처럼 오지만, 그것을 언어로 만드는 건 선택이고 훈련이다. 감정을 들여다보고, 이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 말로 바꾸는 일은 자기 자신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답다. 감정을 말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을 사유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고, 외로움 속에서도 연결을 만든다.
감정은 나의 진짜 목소리다
세상이 시끄럽고, 관계가 복잡해도 내 감정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존재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다. 감정을 해석하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고, 말하려고 한다. 감정은 어지럽고 불완전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나의 일부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감정을 비난하지 않고, 감정을 이용하지 않고, 그저 감정으로 나를 이해하려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자기 자신에게 닿는 사람이다.
감정은 내 마음의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를 듣는 일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식이다.
4장.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문득 누군가를 대하듯, 나 자신을 떠올려본다.
친구가 아프다 하면 걱정하고, 가족이 힘들다 하면 곁에 있으려 애쓰고, 누군가 실수하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아플 땐? “이 정도는 참아야지.” 내가 힘들다고 말할 때는? “그걸 힘들다고 느끼는 내가 이상한 거야.” 내가 실수했을 때는? “왜 이렇게 멍청하지?” “넌 정말 형편없어.”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잔인했다.
나에게 나는 가장 큰 비난자였다
누군가 나를 꾸짖기도 전에 나는 이미 나 자신을 몇 번이고 몰아붙였다. 자책, 비교, 냉소, 무시. 그건 타인이 날 향해 던진 말이 아니었다. 내가 나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나는 내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 보다 백 번은 더 큰 처벌을 스스로에게 내렸다. 아무도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았는데, 나는 나를 그렇게 대했다.
왜였을까?
아마 어릴 적부터 사랑받기 위해 괜찮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하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고, 나약해지면 존중받을 수 없다고 믿었다. 결국 나는 나를 ‘조건부 존재’로 만들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나를 만든다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정체성 그 자체다.
“나는 안 돼.” “나는 늘 부족해.” “나는 누군가의 기대를 항상 못 맞춰.” 이런 말들은 어느새 나의 신념이 되어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나의 관계를 왜곡시켰다.
나는 내 말에 갇혀 살았다. 마치 외부의 감옥이 아니라 내면의 독백이 나를 가두는 감옥이었던 것처럼.
나를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다
내가 나를 괜찮다고 여길 수 있어야 실패도 하나의 경험으로 넘어갈 수 있다. 내가 나를 기다려줄 수 있어야 변화도 가능해진다. 내가 나에게 친절해야 타인의 친절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곧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태도다.
내면의 목소리를 바꾸는 연습
이제 나는 내 안의 목소리를 바꿔보려 한다.
비난 대신 질문을, 무시 대신 이해를, 채찍 대신 기다림을.
“왜 또 이렇게 됐지?” 대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짜 한심해.” 대신, “지금 많이 지쳤구나.”
이 작은 문장들이 내 삶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닫고 있다.
나를 돌보는 법은 특별한 게 아니다
‘셀프케어’라는 말은 때때로 화장품 광고처럼 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진짜 자기 돌봄은 훨씬 더 조용하고 일상적인 행위다.
피곤할 땐, 눈 감고 쉰다.
슬플 땐, 울 수 있게 해 준다.
외로울 땐, 내 감정에 이름을 붙여준다.
잘했을 땐, 스스로에게 “고생했다”라고 말해준다.
나를 돌보는 일은, 나를 다시 신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 더 빛나는 일이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내가, 세상 누구보다 나에게 차가웠다.
이제는, 내가 나에게 가장 먼저 따뜻해지고 싶다.
그것이 내가 나로 살아가는 첫걸음이니까.
5장. 나는 왜 나를 사랑하기 어려운가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혹은, 사랑하려 해도 왜 불편하고, 이상하고, 어색할까?
내가 타인을 사랑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어째서 이토록 서툴고 힘든 걸까.
나를 사랑하기엔, 내가 너무 낯설다
사랑은 이해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나를 잘 모른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어디서 오는 감정인지 헷갈린다.
나의 욕망인지, 타인의 기대인지, 내가 원한 삶인지, 어쩌다 떠밀려 온 자리인지.
나를 잘 모르는데, 그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일처럼 낯설다.
나는 늘 누군가의 기준 속에 있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 괜찮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뭔가 더 해야 했고, 더 나아져야 했고, 더 참아야 했다. 그래야 겨우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나를 성과와 조건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봤다. “잘하면 사랑받고, 못하면 버림받는다.” 이 프레임은 남이 나에게 씌운 것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내가 스스로 나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되어버렸다.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나’는 결국 나 자신에게조차 진짜 내가 아니라 ‘역할’로 여겨졌다.
그런 역할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은 가면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약점을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내 부족함을 감추려 애썼다. 못난 구석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실수, 열등감, 외로움, 초라함… 그런 건 내가 사랑받지 못할 이유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랑은 “괜찮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약점은 그렇게도 쉽게 이해하면서 왜 내 약점에는 그렇게 잔인할까?
결국 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기준과 평가 속에 나를 가둔 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랑은 능력이 아니라, 연습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깨닫는다. 자기 사랑은 재능이 아니라 연습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뻔한 말 같아도, 조금씩, 하루에 한 줄씩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말을 건네다 보면 마음 어딘가가 조금씩 풀린다.
“오늘 많이 버텼어.”
“실수했지만 괜찮아, 그런 날도 있어.”
“지금 그대로도 충분히 의미 있어.”
“너는 항상 무언가를 해내야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야.”
이런 말들을 진심으로 믿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말을 건네는 나 자신이 점점 변해간다.
나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내가 나를 미워할수록 세상도 나에게 차갑게 느껴진다. 내가 나를 불신할수록 관계도 늘 불안하고 흔들린다.
하지만 내가 나를 믿기 시작하면, 조금씩 세상도 덜 적대적으로 느껴지고 내 안의 불안도 덜 흔들린다.
결국 자기 사랑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 맺는 관계의 가장 깊은 뿌리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됐다.
6장. 나 자신을 사랑하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사랑은 어디로 향하는가. 그것이 나 자신을 향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이룬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겨우, 무언가를 시작할 자리에 선 것일까.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 말이 익숙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오해와 눈물이 필요했는가.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럼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지?” “사랑하고 나면, 그다음은 무엇이지?”
사랑이라는 감정은 고요한 마침표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낯선 쉼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이 나를 중심에 놓을 때
나는 나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에 길들여진 채, 그들로부터 ‘허락된 자아’로 존재하고 있는가.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된 순간, 그 허락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는 이제 나만이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자유일까, 책임일까?
사랑은 비교를 멈추게 할까
타인의 삶이 눈부셔 보일 때가 있다. 그 눈부심이 부러움이 되기도 하고, 때론 나를 향한 비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후에도 정말 비교는 사라질까? 아니면 비교라는 행위가 그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하는 걸까?
비교 없는 삶이 가능하다면, 그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걸까. 그것이 ‘무관심’이 아니라면, 혹시 ‘존중’ 일 수도 있지 않을까.
타인과의 관계는 다시 어떻게 바뀌는가
사랑받기 위한 나와 사랑해도 되는 나 사이엔 얼마나 많은 가면이 존재해 왔는가.
그 가면들을 벗어낸 뒤에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은가? 아니면 이제는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은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타인에게 내미는 손은 어떤 감정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삶을 창조한다는 건 무엇인가
내가 나를 받아들이게 된 후 내 삶은 더 자유로워졌을까, 혹은 더 모호해졌을까?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기보다, ‘왜 살아가는가’를 묻게 되는 지금, 삶은 어떤 결을 가지게 되는가.
의미는 만들어내는 것일까, 발견하는 것일까. 혹은 그 두 가지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일 수도 있을까.
사랑은 나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기애는 자기만을 위한 감정일까. 아니면, 나를 품는 순간 타인에게 닿는 방식 또한 바뀌게 되는 것일까?
내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수록, 타인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이란 결국 자기와 세계 사이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가는 일 아닐까. 그 벽이 허물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우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사랑은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한 방식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완성되지 않은 것.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이제 묻는다. 나는 이 사랑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