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by 조가

불길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나는 끝없는 들판을 건너 오래 걸었다.
하루인지, 한 달인지, 혹은 한 생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고,
나는 단지 ‘흘러야 할 것’을 잊은 존재처럼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것을 보았다.
호수.
세상의 어떤 빛보다도 깊고, 조용한 물이었다.
바람도 닿지 않는 곳.
파문조차 일지 않는 거울 같은 물.

나는 천천히 다가가 호숫가에 앉았다.
물속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나의 얼굴도, 하늘의 별도, 지나간 불길도 없었다.
그건 모든 형상을 삼킨, 완전한 고요였다.

“이게 나인가.”

나는 속삭였다.
호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내 안에서 울렸다.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누군가의 아들, 친구, 연인, 실패자, 방랑자.
그 모든 이름은 나를 설명하려 했지만,
결국 나를 가두는 말이 되었다.

이제, 그 이름들이 다 사라진 자리에
무언가 남아 있었다.
이름 없는 ‘감각’.
그건 공허였지만, 동시에 안도였다.

나는 손끝을 물속에 담갔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은 나를 깨웠다.
마치 수면 아래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나의 ‘진짜 나’가
조용히 눈을 뜨는 듯했다.

그때, 호수 속에서 미세한 흔들림이 일었다.
물결이 번져가며, 어렴풋한 그림자가 보였다.
처음엔 내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그것은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불길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얼굴,
저울을 들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
미로 속에서 나를 조롱하던 또 다른 나의 얼굴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아직도 너라고 부를 수 있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수는 잔잔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제 ‘하나의 나’가 아니었다.
수많은 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하나로 섞이는 존재.
즉, “변화하는 것 자체가 나”였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호수의 냄새를 맡았다.
조용한 물, 젖은 흙, 풀잎, 그리고 아주 희미한 피 냄새.
삶의 냄새였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호수의 물결이 내 얼굴을 스쳤다.
차가웠지만 따뜻했다.
그건 어쩌면 ‘살아 있음’이라는 감각의 온도였다.

나는 속삭였다.

“이제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멀리서 빛이 보였다.
문이었다.
이번엔 하얀 문도, 검은 문도 아닌,
투명한 문이었다.
그 문은 열려 있었고,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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