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고요 속의 나

by 조가

문을 넘자, 모든 빛이 사라졌다.
하얗지도, 검지도 않은, 아무 색도 없는 공간이었다.
소리도, 냄새도, 감각도 없었다.
그저 존재의 원형 같은 정적만이 나를 감쌌다.

나는 걷고 있었다.
하지만 땅의 감촉이 없었다.
발끝이 닿는 자리가 바로 사라지고,
그 사라짐조차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마치 세계가 나의 발자국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존재하고 있는가?’

숨을 쉬어도 공기의 온도가 없었고,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그 박동의 의미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의식하려 했으나, 의식하는 그 ‘나’가 이미 희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라짐은 고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도였다.
평생 나를 짓누르던 모든 이름, 모든 기억, 모든 판단이
조용히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처음엔 살갗 같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단지 옷감 같은 것들이었다.

‘나’라는 옷이 벗겨지고 나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아무것도 없음’이 처음으로 편안했다.


멀리서 물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마침내 내 앞에 닿았다.
그곳엔 또 하나의 호수가 있었다.
이번엔 미로 밖도, 저울의 마을도, 불타는 광장도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호수.

나는 그 앞에 앉았다.
물은 고요했고, 별빛이 스며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나’가 아니었다.
수많은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

아이였던 나,
사랑받지 못하던 나,
사랑을 잃은 나,
세상 앞에서 분노하던 나,
도망쳤던 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디지 못해
끝내 문을 넘었던 나.

그들은 모두 내게 속삭였다.

“우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너의 일부로 흩어졌을 뿐이다.”

그 순간, 물결이 일었다.
얼굴들이 하나로 합쳐지고, 다시 찢어지고,
끝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호수는 다시 고요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알았다.
나는 그들 모두였고,
또 그들 누구도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는 그 단순한 감각이
눈물 나게 생생했다.
나는 내 심장의 소리를 들었다.
그건 작은 파동이었지만, 확실히 살아 있었다.

“살아 있다.”
그 말을 속으로 반복했다.
그건 더 이상 선언이 아니라, 기도였다.

살아 있다는 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흔들리고, 미완이며, 불안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존재의 리듬이었다.
멈추면 죽는 박동.
흔들릴수록 살아 있는 생.


나는 호숫가에 오래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모름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답을 찾아 헤매는 자가 아니었다.
나는 질문 그 자체였다.
나는 움직이는 물결이었고,
고요 속에서 잠시 흔들리는 바람이었다.

그때, 저 멀리 빛이 보였다.
그건 내가 지나온 문과 닮았지만, 이번엔 형태조차 없었다.
빛은 문이 되었고, 문은 곧 사라졌다.
그 사이로 미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없는 자여,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그 물음은 더 이상 ‘누가’ 내게 던진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나 자신이 나에게 던진,
끝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음마다 세계가 열리고, 닫히고, 다시 피어났다.
마치 존재가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나는 나를 잃었다.
그러나 그 잃음 속에서, 나는 모든 것과 이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모름이, 이제 나의 이름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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