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겨울의 끝자락은 언제나 모호하다. 봄의 전령을 기다리는 설렘과, 떠나가는 계절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공기는 유독 무겁고도 투명하다. 그 모호한 경계의 밤, 예고도 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아닌 비다. 이 비는 겨울의 완고함을 녹여 바다로 보내려는 대지의 작별 인사일까, 아니면 다가올 봄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서곡일까. 가로등 불빛 아래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오랫동안 문장 속에 묻어두었던, 아니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의 갈피를 다시 들춰본다.
밤의 가로등은 평범한 풍경도 특별한 무대로 만든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가로등은 각자의 영토를 비추며 빗줄기를 가시화한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빗방울들이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 비로소 은실처럼 가늘게 빛나며 제 존재를 드러낸다.
그 빛과 빗줄기의 교차점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의 잔해들이 하나둘 부표처럼 떠오른다. 기억은 참 묘한 것이다. 억지로 떠올리려 애쓸 때는 안갯속처럼 뿌옇기만 하더니, 이렇게 비릿한 흙내음과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어우러지는 순간에는 예고도 없이 선명해진다.
오래전,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와 비슷한 빗줄기를 세던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 늘 휘청거렸고, 다가올 미래보다 떠나가는 순간들에 더 집착했다. 가로등 아래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던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내가 이토록 긴 세월을 지나 다시 그 자리에 서게 될 줄 알았을까. 빗줄기는 가로등 사이를 통과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투명한 다리가 된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란을 잠재운다. 겨울비는 여름의 소나기처럼 요란하지 않다. 차분하고 낮게, 낮은 곳으로만 흐르며 세상을 적신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전성기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지지직거리는 잡음 같기도 하고, 누군가 귓가에서 나직이 읊조리는 고해성사 같기도 하다.
수필을 쓰는 사람에게 비는 가장 좋은 문장가다. 비는 수식어를 쓰지 않는다. 그저 내릴 뿐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행위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나의 감수성을 말랑하게 적신다. 나는 빗소리에 맞춰 타자기를 두드린다. 아니, 마음의 필체를 가다듬는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은 대단한 사건들이 아니다. 비 오는 날 나누었던 미지근한 커피 한 잔의 온기, 우산 속에서 살짝 닿았던 어깨의 감촉, 그리고 끝내 내뱉지 못하고 삼켜야 했던 말의 잔상들이다. 그 사소한 기억들이 가로등 빗줄기 사이로 어른거리며 말을 걸어온다. "당신은 그때 정말 최선을 다해 사랑했나요?" 혹은 "그때의 고독이 지금의 당신을 만든 것을 알고 있나요?"라고.
가로등 불빛 아래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지난번 다녀온 겨울 바다의 풍경이 겹쳐진다. 그날도 비가 왔더라면 어땠을까. 모래사장 위에 내리는 비는 파도 소리에 묻혀 형체도 없이 사라졌겠지만, 해변 옆을 지키던 그 굽은 소나무들은 이 비를 온몸으로 받아냈을 것이다.
소나무 가지 끝에 맺힌 빗방울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작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겨울의 막바지, 차가운 비를 맞으며 소나무는 제 안의 푸른 생명력을 다시 한번 점검할 것이다. 비는 소나무의 거친 껍질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깊은 뿌리까지 생명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제 곧 봄이다. 준비를 마쳐라."
나의 기억 또한 소나무의 껍질처럼 거칠고 투박하게 굳어있었다. 하지만 오늘 내리는 이 비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잊었던 감정의 수액을 다시 흐르게 한다. 아픈 기억도, 그리운 기억도, 결국은 나라는 존재를 지탱해 온 소중한 뿌리였음을 깨닫는다.
"기억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빗물에 씻어내어 맑게 보관하는 것이다."
가로등 사이로 보이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누군가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수필이라는 형식은 때로 가장 사적인 고백이 되기도 한다.
"그대, 잘 지내고 있나요? 겨울의 끝자락에 비가 내립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춤추는 빗줄기를 보며 당신의 뒷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맞았던 비는 이제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지만, 오늘 내리는 이 비는 그때의 우리를 다시 불러냅니다. 당신에게도 이 빗소리가 들리나요?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정말 봄이 오겠지요. 하지만 나는 이 비가 조금 더 오래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과의 기억을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어서요."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가로등 불빛은 더 몽환적으로 번져간다. 기억은 이제 슬픔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는다. 오래된 세월은 감정을 거르는 체가 되어, 찌꺼기는 걸러내고 순수한 본질만을 남겼다. 가로등 사이의 빗줄기는 그 본질을 보여주는 현미경과 같다.
이제 창을 닫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가로등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빗길을 비춘다. 잊었던 기억들은 다시 마음의 서랍 속으로 조용히 들어간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빗물에 한 번 깨끗이 씻겨 내려간 기억들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은 겨울을 버티고 다가올 봄을 맞이할 든든한 양분이 되었다.
겨울의 막바지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다. 그것은 과거의 미련을 씻어내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대지의 세례식이다. 가로등 아래 빗줄기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던 그 기억들 덕분에, 나의 문장은 한층 더 깊고 투명해졌다.
내일 아침이면 비는 그치고 공기는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다. 가로등 불빛도 흐릿해진 새벽녘, 나는 다시 펜을 들고 오늘의 풍경을 기록할 것이다. 겨울 바다의 소나무처럼, 모래알 같은 마음의 입자들을 보듬으며, 그렇게 또 한 계절을 건너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