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의 유언>

추리 소설

by 산들강바람

제12장: 최후의 만찬


1. 돌아온 청평 저택: 비어 있는 주인의 자리


서장의 체포와 비자금 장부의 공개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지만, 수현은 승리감에 도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검찰 호송차 대신 자신의 차를 몰아 다시 청평의 차도진 저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수사관들의 삼엄한 감시 아래, 구속 수사 중인 김 편집자와 최 형사, 그리고 병보석 중인 가정부 박 씨가 '현장 검증'이라는 명목하에 모여 있었다.


저택 서재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수현은 도진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도진이 죽던 날 밤과 똑같이 찻잔 세트와 식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현장 검증이라니, 이미 자백도 다 끝난 마당에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최 형사가 불쾌한 듯 쇠사슬 묶인 손을 흔들며 물었다.


수현은 대답 대신 테이블 중앙에 놓인 커다란 **은제 덮개(Cloche)**를 가만히 응시했다.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이 식탁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가 설탕 한 알보다 가벼운지, 아니면 이 저택보다 무거운지 직접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말이죠."


2. 수사관의 재구성: 멈춘 시계의 또 다른 용도


수현은 베테랑 수사관다운 냉철함으로 서재 곳곳을 지목했다.


"김 편집자님, 당신은 11시 11분에 시계가 멈춘 것이 단순한 살인 시간 기록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전문가의 시선으로 다시 본 이 시계는 '알리바이 제조기'가 아니라 '범인 식별기'였습니다."


수현은 괘종시계의 하단부를 발로 툭 쳤다. 그러자 시계 추 뒤편에서 작은 레이저 포인터가 작동하며 바닥에 투사되었다. 레이저가 가리킨 곳은 김 편집자가 서 있던 자리와 최 형사가 증거를 인멸하려던 위치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시계 기어에 설탕을 뿌려 시간을 멈춤과 동시에, 특정 각도에서만 작동하는 광학 장치를 가동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서재에서 움직일 때마다, 당신들의 옷깃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특수 형광 염료가 묻었습니다. 이제 불을 꺼보죠."


3. 암전 속의 낙인: 범인들의 만찬


수현이 리모컨을 누르자 서재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암흑 속에서 수현이 자외선램프를 켜자, 최 형사와 김 편집자의 소매와 구두굽에서 선명한 보라색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진이 키우던 투구꽃의 추출물로 만든 특수 잉크였다.


"이건...!"


최 형사가 경악하며 자신의 소매를 문질렀지만, 빛은 더욱 선명하게 번져나갈 뿐이었다.


"당신들이 부인하던 '그날 밤의 동선'이 당신들의 몸에 박제되어 있습니다. 최 형사님, 당신은 서재에 들어온 적이 없다고 했지만, 당신의 구두 밑창은 지금 도진 선생님의 혈흔이 튀었던 바로 그 지점을 밟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군요."


수현은 테이블 위의 은제 덮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 안에는 음식이 아니라, 김 편집자가 그토록 찾으려 했던 '진짜 마지막 페이지'의 원본이 놓여 있었다.


4. 최후의 폭로: 거울의 배신


"자, 이제 만찬을 시작해 볼까요? 이 원고의 마지막 장에는 당신들이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던 이름들이 적혀 있습니다."


수현은 원고를 한 장씩 넘기며 그들의 면전에서 읽어 내려갔다. 단순히 20년 전의 사건이 아니었다. 도진은 죽기 전 수년간, 김 편집자가 출판사를 통해 세탁한 자금의 흐름과 최 형사가 경찰 내부에서 누구에게 뇌물을 상납했는지까지 모든 '공모의 족보'를 완성해 두었던 것이다.


가정부 박 씨가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우리가 이럴 줄 다 알고 계셨던 건가요?"


수현은 박 씨의 슬픈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당신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기회를 주길 바라셨지만, 결국 당신들은 그가 차려놓은 '진실의 만찬'에 독을 타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때, 저택 밖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서재의 창문을 거칠게 흔들었다. 11시 11분에 멈췄던 괘종시계가 갑자기 11시 12분으로 넘어가며 육중한 종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는 정말로 죽은 자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결의 선언처럼.


5. 분열의 식탁: 괴물들의 자백


보라색 형광 잉크가 낙인처럼 찍힌 채, 가해자들 사이의 팽팽했던 공조는 비명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가장 먼저 균열이 생긴 것은 최 형사였다. 그는 자신의 소매에 묻은 보라색 빛을 광적으로 털어내며 김 편집자의 멱살을 잡았다.


"이 새끼가... 분명히 흔적은 안 남는다고 했잖아! 네가 구한 독초가 문제였던 거야, 아니면 네 그 잘난 출판사 잉크가 문제였던 거야!"


김 편집자는 넋이 나간 듯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선생님은 알고 있었어. 우리가 들어올 것도, 우리가 어디를 만질지도... 이건 살인 현장이 아니야. 거대한 기록 장치였던 거야."


수현은 그들의 추악한 다툼을 차갑게 지켜보았다. 수사관으로서 수없이 봐온 광경이었다. 거대한 이익으로 묶인 동맹은 진실이라는 빛 앞에서 가장 먼저 부패하기 마련이다.


"서로 탓할 것 없습니다. 최 형사님은 도진 선생님의 시신을 옮기며 증거를 조작하려다 바닥의 염료를 밟았고, 김 편집자님은 원고를 훔치려 서랍을 뒤지다 손가락에 낙인이 찍혔으니까요. 두 분 모두 이 '만찬'의 주인공으로 자격이 충분합니다."


6. 밀실의 해법: 11분의 인내


"하지만 한 경위... 하나만 묻지." 최 형사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 노인네는 분명히 우리 앞에서 그 독이 든 차를 마셨어. 그런데 어떻게 11분 동안이나 멀쩡히 살아서 시계에 설탕을 뿌리고 이런 장치들을 가동한 거지? 그건 인간의 체력이 아니야."


수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찻잔 바닥에 교묘하게 덧대진 이중 바닥을 보여주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독을 탈 것을 미리 알고, 찻잔 안에 아코니틴의 독성을 일시적으로 중화시키는 '강심제' 성분을 미리 발라두셨습니다. 설탕은 그저 여러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죠. 선생님은 자신의 심장을 강제로 뛰게 만들며, 죽음과 삶의 경계인 그 11분 동안 오직 수사관으로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신 겁니다."


수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베테랑의 기술이 아니라, 한 인간의 초인적인 의지였다. 도진은 자신의 고통을 연장하면서까지 진실이 사멸하지 않도록 기록을 남긴 것이었다.


7. 마지막 증인: 가정부의 고백


침묵을 지키던 가정부 박 씨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다 알고 계셨어요. 제가 매일 아침 약통에 독가루를 섞는 걸 보면서도 '아주머니 손은 참 따뜻하군'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분은 저에게 죽음을 선물하신 게 아니라, 제 원한을 대신 짊어지고 가신 거였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


박 씨의 자백은 쐐기가 되었다. 김 편집자와 최 형사는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수현은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곳은 더 이상 선생님의 서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죄를 확정 짓는 법정이죠. 이제 그만 만찬을 마치고, 여러분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시죠."


8. 잉크가 멎은 저택의 새벽


가해자들이 수사관들에 의해 압송되어 나간 뒤, 서재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수현은 홀로 남아 창밖을 보았다. 안개는 완전히 걷혔고, 호수 저편에서 새벽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도진의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책상 위에는 이제 빈 찻잔과 정리가 끝난 원고 뭉치만이 남았다. 수현은 스승의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12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종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비로소 **'무너지는 알리바이'**의 장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스승이 목숨과 맞바꾸며 지키려 했던 **'마지막 페이지의 진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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