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도서관』

소설

by 산들강바람

4장: 은영의 진실

한울은 떨리는 손으로 『서은영의 기억』의 페이지를 넘겼다. 서연이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책 속에서 은영의 삶이 펼쳐졌다. 한울이 몰랐던 은영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그리고...


"오늘 소개팅 나가기 싫다. 친구가 자꾸 밀어붙여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건데..."


2019년 3월의 기억이었다. 한울과 처음 만난 날. 은영의 시선에서 본 그날은 한울이 기억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네. 말도 재밌고, 눈빛이 순해 보여. 그런데 왜 자꾸 내 핸드폰을 힐끗힐끗 쳐다볼까?"


한울이 멈칫했다. 첫 만남부터 그는 은영의 사생활을 궁금해했던 것일까?

페이지를 넘기며 연애 초기의 기억들을 읽었다.


"한울이는 정말 다정해. 매일 좋은 아침 메시지 보내주고, 점심시간마다 안부 묻고... 그런데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 내가 답장을 조금만 늦게 해도 '뭐 하고 있었어?'라고 계속 물어봐."


"오늘 친구들과 술 마신다고 했더니 몇 번이나 연락이 왔어. '누구랑 마셔?', '몇 시에 끝나?', '집에 언제 들어가?'... 처음에는 걱정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자신은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은영에게는 감시로 느껴지고 있었다.


"한울이랑 동거를 시작했다. 행복하긴 한데... 내 개인 공간이 없어졌어. 화장실 갈 때도 뭐 하러 가냐고 물어보고, 내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누구한테서 온 건지 궁금해해."


"오늘 회식이 있다고 했더니 한울이가 회사 앞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깜짝 선물이라고 했지만... 내가 정말 회식에 갔는지 확인하려고 온 것 같아."


한울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책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계속 읽어."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한울이 한 테 말했다. 너무 답답하다고. 내가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고. 그랬더니 울더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왜 그게 부담이야?'라고. 사랑과 집착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지?"


"결국 이별을 통보했다. 더 이상 못 하겠어. 한울이는 좋은 사람이야. 마음도 따뜻하고,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소유야. 난 한울이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그리고 마지막 날의 기억이 나왔다.


"새벽에 집 앞에서 한울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술에 취해서 울고불고... 정말 힘들었어. 하지만 여기서 넘어가면 안 되겠어. 한울이를 위해서라도."


한울이 그 부분을 여러 번 읽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울이가 매달렸다. '다시 생각해 봐', '나 정말 바뀔 수 있어'... 예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어. 하지만 바뀐 건 없었지. 오히려 더 심해졌어."


"길을 건너려고 했다.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고, 한울이가 술에 취해서 위험해 보였거든. 그런데..."


사고 순간의 기억이었다. 한울은 숨을 죽이고 읽었다.


"택시가 오고 있었어. 나도 봤어. 하지만 한울이가 뛰어오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어. '은영아!' 하고 소리치면서..."


한울의 손이 멈췄다.


"아, 한울이가 나를 구하려고 했구나. 미처 못 했지만..."


"의식을 잃기 직전에 생각했어. '한울이 괜찮나?' '한울이 자책하겠다.' 내가 죽으면 한울이가 더 망가질 것 같았어."


병원에서의 기억들이 이어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처음 든 생각. '한울이한테 미안하다고 해야지.' 이별은 내 선택이었지만, 이 사고는 아무의 잘못도 아니야. 하지만 한울이는 자기 탓이라고 생각할 거야."


"한울이가 병실에 와서 울고 있었어. '미안해, 미안해' 계속 반복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괜찮다'였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어."


"의사가 말했어. 많이 위험하다고. 그제서야 깨달았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그럼 한울이는 평생 자책하면서 살겠구나."


마지막 날의 기억이었다.


"한울이가 내 손을 잡고 있었어. 차가운 손이 따뜻해졌어.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한울아, 미안해. 네가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아무의 잘못도 아니야. 그리고...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 없이도.'"


한울이 책을 덮었다. 눈물이 흘렀다.


"은영이가... 은영이가 날 걱정한 거였어?"


"응."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까지 너를 걱정했어. 네가 자책할까 봐."


"하지만 난... 난 정말 죽었잖아. 은영이가 걱정했던 그대로 됐잖아."


한울이 울먹였다.


"그래. 하지만 이제 알았잖아. 은영이가 진짜 원했던 게 뭔지."


"뭔데요?"


"네가 행복하기를. 자책하지 않기를. 그리고..."


서연이 한울을 바라보았다.


"놓아주기를. 은영이를, 그리고 너 자신을."


한울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요? 어떻게 놓아줘요? 다 제 잘못인데..."


"잘못이 아니야, 한울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지. 그리고 은영이도 그걸 알고 있었어."


서연이 『서은영의 기억』을 다시 열었다. 중간 부분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한울이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단지 사랑이 뭔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을 뿐이야.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자란 한울이에게는 애정표현이 곧 관심과 관리였을 거야. 하지만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지."


"언젠가는 한울이도 깨달을 거야. 진짜 사랑이 뭔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를 보내줄 수 있을 거야. 나도 그때까지 기다릴게."


한울이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은영이가... 날 이해해 줬다는 거예요?"


"그래. 너의 집착도, 너의 아픔도 모두 이해하고 있었어. 그리고 용서했어."


"그럼 이제...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서연이 미소를 지었다. 80년 만에 진심으로 지은 미소였다.


"이제 진짜 사랑이 뭔지 배울 때야. 은영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보내줘야 한다는 거죠?"


"그래. 그리고 너도 보내줘야 해. 너 자신을."


한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80년을 기다린 서연의 마지막 수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5장: 놓아주는 법

며칠이 흘렀다. 한울은 『서은영의 기억』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였다. 은영의 마음, 자신의 잘못,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선배님."


한울이 서연에게 다가갔다.


"응?"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정말로 놓아줄 수 있을까요?"


서연이 한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도서관에 왔을 때의 혼란스러운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보였다.


"먼저 너 자신을 용서해야 해."


"제 자신을요?"


"그래. 네가 은영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야. 비록 방법이 잘못됐지만."


한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영이가 책에서 뭐라고 했지? 너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단지 사랑하는 법을 몰랐을 뿐이라고."


"네..."


"그럼 이제 배우면 돼. 진정한 사랑이 뭔지."


서연이 한울의 손을 잡았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거야. 내가 없어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고."


"그런데... 그러면 외롭지 않을까요?"


"외로울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게 진짜 사랑이야. 자기 외로움보다 상대방의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기는 거."

한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배님도... 민수 씨를 그렇게 놓아주신 건가요?"


서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80년 걸렸지만, 결국 깨달았어. 민수가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 새로운 가족과 행복한 게 더 좋은 일이었다는 걸."


"아프지 않았어요?"


"많이 아팠어. 하지만 그 아픔이 진짜 사랑의 증거였어. 내 아픔보다 아이의 행복이 더 소중했으니까."


한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은영이도 그런 건가요? 제가 아픈 것보다 은영이가 평안한 게 더 중요한 거요?"


"그래. 이제 알겠구나."


그날 밤, 한울은 『서은영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마음으로 읽었다. 은영을 붙잡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은영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한울이와 함께한 3년이 모두 나쁘지만은 않았어. 처음 6개월은 정말 행복했거든. 한울이의 순수한 마음, 나를 아끼는 따뜻함... 그때의 한울이는 정말 좋았어."


"만약 한울이가 조금만 더 여유로웠다면, 내 공간을 인정해 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어쩌겠어.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한울이도, 나도."


한울이 그 부분에서 멈췄다. 은영도 완벽하지 않았다고? 자신만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페이지를 넘기자 은영의 후회들이 나왔다.


"나도 잘못한 게 있어. 한울이의 불안함을 알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냥 답답하다고만 했지, 왜 답답한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았어."


"한울이가 어린 시절 혼자 자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냥 '과거는 과거야'라고 넘겨버렸어."


"마지막에 이별을 통보할 때도... 너무 차갑게 했나? 한울이 마음을 더 헤아려줄 수 있었을 텐데."


한울이 눈물을 흘렸다. 은영도 후회하고 있었다. 서로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서툴게 사랑했던 것이다.


"만약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한울이한테 말해주고 싶어. '우리 둘 다 잘못했어. 그리고 둘 다 최선을 다했어. 이제 서로를 용서하자'라고."


그 순간, 한울 앞에 은영이 나타났다.


"은영아?"


희미한 형태였지만 분명히 은영이었다. 은영이 미소를 지었다.


"안녕, 한울아."


"네가... 진짜 네가 맞아?"


"기억서를 통해서 잠깐 나타날 수 있어.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한울이 다가가려 했지만, 은영이 손을 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 이게 마지막이어야 하거든."


"은영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도 미안해, 한울아. 우리 둘 다 서툴었어."


은영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야.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사랑이었어."


"나... 나 없이도 행복할 수 있었을까? 네가 살아있었다면?"


"물론이야. 그리고 너도 그래야 해. 나 없이도."


"어떻게? 어떻게 너 없이 살아?"


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한울아, 너 아직도 몰라? 나는 이미 너 안에 살고 있어."


"무슨 뜻이야?"


"네가 나를 사랑했던 그 마음, 나와 함께 행복했던 기억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 그게 다 너 안에 있잖아."


은영이 한울을 바라보았다.


"그게 진짜 나야. 네가 붙잡으려 했던 육체의 나가 아니라, 네 마음속에 살아있는 사랑의 나. 그 나는 영원히 너와 함께할 거야."


한울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럼... 널 보내준다는 건?"


"내 육체에 대한 집착을 보내주는 거야. 내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대신 우리의 사랑을 기억으로 간직하는 거지."


"그럼 넌 어디로 가?"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리고 너도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야 해."


은영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한울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뭐야?"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서툴렀지만 진심이었다는 거 알아. 그리고... 이제는 정말 행복해."


"나도... 나도 사랑해, 은영아. 그리고 미안해."


"나도 사랑해. 그리고 나도 미안해."


은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한울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서연이 다가왔다.


"어떤 기분이야?"


"슬프면서... 동시에 평안해요. 이상하죠?"


"아니야. 그게 정상이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줄 때의 기분이거든."


한울이 서연을 바라보았다.


"선배님은 언제 떠나세요?"


서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곧. 내 임무가 끝났거든."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너도 곧 선택해야 해. 여기서 더 머물면서 다른 영혼들을 도울 건지, 아니면 진정한 안식에 들 건지."


한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요."


서연이 한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한울아. 정말 잘했어."


그녀의 손길이 따뜻했다. 80년 만에 진정한 평화를 찾은 영혼의 따뜻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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