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도서관』

소설

by 산들강바람

2장: 80년의 기다림

그날 밤, 서연은 잠들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곳의 영혼들에게 잠이란 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았을 때의 습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 80년 전에도 그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이었다. 모든 사람이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부르던 그날, 스물다섯의 서연은 빈 집에 혼자 앉아 울고 있었다.


"민수야... 엄마가 찾아줄게. 꼭 찾아줄게."


일곱 살 아들 민수. 광복 직후의 혼란 속에서 사라진 아이. 일본이 항복하고 갑작스럽게 질서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고,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떠나려 했고,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그 혼란 속에서 민수가 인파에 휩쓸려 사라진 것이다. 서연은 해방이 되면,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아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혼란은 더욱 심해졌고, 분단과 전쟁이 이어졌다.

3년을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아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1948년 어느 겨울밤, 서연은 한강 다리 위에 섰다.


"민수야, 엄마가 간다. 어디 있든지 엄마가 찾아갈게."


차가운 강물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이곳, 기억 도서관이었다.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의식이 있었고, 이상한 공간에서 책들을 정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곳이 연옥 같은 곳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제대로 떠나지 못했다는 것을.


"언젠가는 민수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희망으로 80년을 버텼다. 그동안 수많은 영혼들이 왔다가 갔다. 어떤 이는 금세 깨달아 떠났고, 어떤 이는 수십 년을 머물다 갔다. 서연은 그들을 도우며 조금씩 자신도 치유되어 갔다.

그리고 10년 전, 드디어 민수의 기억서가 도착했다.

『박민수의 기억』

손이 떨렸다. 70년을 기다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억서를 열어본 서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민수는 살아있었다. 광복 후 혼란 속에서 헤어진 후 다른 가족에게 입양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새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자식들도 낳았다. 평생 친엄마를 그리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90세의 민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는 어떻게 사셨을까. 행복하셨기를..."


서연은 그날 밤 실컷 울었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아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안도감, 하지만 자신 때문에 마지막까지 그리워했다는 죄책감.

그 후로 서연은 변했다. 자신의 집착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 깨달았다. 민수는 이미 충분히 사랑받으며 살았고, 자신이 찾지 못한 것도 어쩌면 아이에게는 더 좋은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완전히 놓아줄 수는 없었다.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아있었다. 자신처럼 집착에 매인 영혼을 도와주는 것.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6개월 전, 한울이 왔다.

새벽이 되자 한울이 일어났다. 사실 그도 잠들지 못했다. 『서은영의 기억』이라는 책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이 이름이 익숙하지?"


한울은 자신의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여전히 희미했다. 마치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느낌만 강렬했다.


"아침이야?"


서연이 다가왔다.


"네. 일찍 일어나셨네요."


"잠이 안 와서. 너도 그런 것 같고."


한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어제 그 기억서..."


"서은영?"


"네. 계속 신경이 쓰여요. 분명히 중요한 사람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


서연이 한울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더 깊이 매몰될 수 있었다.


"오늘은 다른 일부터 하는 게 어떨까? 새로 온 기억서들이 많아."


"하지만..."


"한울아."


서연의 목소리에 묘한 권위가 있었다.


"기억이라는 건 때가 있어. 억지로 떠올리려 하면 더 멀어질 수 있어. 자연스럽게 기다리는 게 좋을 때가 있지."


한울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 어제 『서은영의 기억』을 두었던 곳으로 향했다.

그날 하루 종일 한울은 다른 기억서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딴 곳에 있었다.

『정미영의 기억』 - 1985년생,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젊은 여자의 기억. 한울이 책을 만지자 슬픔과 후회의 감정이 전해져 왔다.

『최영호의 기억』 - 1960년생,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떠난 가장의 기억.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느껴졌다.

『이순자의 기억』 - 1930년생, 95세까지 장수하며 평화롭게 떠난 할머니의 기억.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감정이었다.

각각 다른 삶, 다른 감정들. 하지만 한울은 집중할 수 없었다.


"한울아, 괜찮아?"


서연이 물었다. 한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오후가 될수록 머리가 점점 아파졌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일찍 쉬는 게 어떨까?"


"아니에요. 더 할 수 있어요."


한울이 다음 기억서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

『이한울의 기억』

자신의 이름이 적힌 기억서였다.


"이건... 이건 뭐죠?"


한울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연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네 이름이..."


서연도 당황한 것 같았다.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한울의 기억서도 이미 도착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다른 곳에 따로 보관해 두었는데...


"관리인이 실수한 것 같네. 동명이인일 거야."


"동명이인이요?"


"응. 이한울이라는 이름이 흔하잖아."


하지만 한울은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기억서를 만진 순간, 다른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전해져 왔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아니면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이거... 정말 다른 사람 거예요?"


"당연하지. 네가 살아있는데 네 기억서가 있을 리 없잖아."


서연의 말에 한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다.

그날 밤, 한울은 다시 잠들지 못했다. 『서은영의 기억』과 『이한울의 기억』. 두 권의 책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누구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멀리서 서연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시작되고 있어. 이제 정말 시작이야.'

80년을 기다린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3장: 운명의 발견

사흘이 지났다. 한울은 『서은영의 기억』을 건드리지 않았다. 서연의 조언을 따르려 했지만, 그 책은 마치 자석처럼 그를 끌어당겼다.

낮에는 다른 일에 집중하려 했다. 새로 도착한 기억서들을 분류하고, 서가에 정리하고, 관리인이 주는 업무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견딜 수 없었다.

『서은영의 기억』이 놓인 테이블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갈색 가죽 표지에 금색 글씨로 적힌 이름. 서은영. 왜 이 이름이 이렇게 친숙할까?


"한울아."


서연이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네?"


"내가 뭔가 말해줄 게 있어."


"무슨 이야기요?"


서연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는 영혼들은... 모두 이유가 있어. 단순히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에 매여있기 때문이야."


"매여있다는 게..."


"집착, 후회, 미련... 그런 것들. 그래서 제대로 떠나지 못하고 이곳에 머무는 거야."


한울이 서연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도서관의 본질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선배님은 왜 여기 계세요?"


"나는... 80년 전에 아들을 잃었어. 그 아이를 찾겠다는 집착으로 이곳에 온 거야."


"그럼 지금은?"


"이제 거의 다 놓았어. 아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 확인했거든.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남았어."


"마지막 한 가지요?"


서연이 한울을 바라보았다.


"너 같은 아이를 도와주는 것. 그러면 내 임무가 끝나."


한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한울아, 너도 무언가에 매여있어서 이곳에 온 거야. 그리고 그 답은..."


서연의 시선이 『서은영의 기억』으로 향했다.


"그 책에 있을 거야."


그날 밤, 한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서연이 잠든 후, 그는 조용히 일어나 테이블로 다가갔다.

『서은영의 기억』

손이 떨렸다. 책을 만지는 순간, 강렬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사랑, 그리움, 후회, 그리고... 분노?


"서은영... 누구야? 너는 대체 누구야?"


한울이 책을 열었다.

첫 페이지에는 사진이 붙어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의 사진. 긴 머리, 밝은 미소, 따뜻한 눈빛.

그 순간, 한울의 머릿속에 기억이 폭발했다.


"은영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책을 놓쳤다. 기억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한울아, 오늘 회사에서 정말 재밌는 일이 있었어!"


"우리 내년에 결혼할까?"


"한울아, 너 요즘 너무 심해. 나도 숨 좀 쉬게 해 줘."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우리 잠깐 거리를 두자."


그리고 마지막 기억.


"한울아! 뒤에 차가!"


쾅!


"아... 아니야. 아니야!"


한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은영. 3년간 사귄 연인. 함께 살았고,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 그리고...


"내가... 내가 죽인 거야."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은영이 이별을 통보한 날 밤. 한울은 술에 취해 은영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새벽에 나타난 은영에게 매달렸다.


"은영아, 다시 생각해 봐!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한울아, 제발... 이러지 마."


"나 정말 바뀔 수 있어. 네가 숨 막혀한다면서? 안 그럴게. 진짜로."


"한울아, 이미 늦었어. 난 더 이상 못 하겠어."


은영은 한울을 밀어냈다. 그리고 급하게 길을 건너려 했다. 새벽 6시, 아직 어두운 시간. 그녀는 뒤에서 오는 택시를 보지 못했다.


"은영아!"


한울이 뛰어가려 했지만 늦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은영이 쓰러졌다.

병원에서 3일을 버티다가 은영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한울아... 미안해. 네가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후 한울은 미쳐갔다. 죄책감과 절망에 빠져 1년을 버텼다. 그리고 2022년 어느 겨울날...


"은영아... 미안해. 나도 갈게."


한울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난... 죽었구나."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 은영도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실.


"서연 선배님!"


한울이 소리쳤다. 서연이 급하게 다가왔다.


"한울아, 괜찮아?"


"저... 저 죽었어요. 그리고 은영이도... 은영이도 제 때문에..."


한울이 울기 시작했다. 죽어서도 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서연이 그를 껴안았다.


"이제 기억났구나."


"제가... 제가 은영이를 죽였어요. 제 집착 때문에... 제 이기심 때문에..."


"아니야, 한울아. 그건 사고였어."


"아니에요! 제가 매달리지 않았으면... 제가 놓아줬으면..."


한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럼 은영이는 지금도 살아있었을 거예요!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거라고요!"


서연이 한울의 어깨를 잡았다.


"한울아, 이제 은영이의 기억을 봐야 해."


"뭐요?"


"은영이가 정말 어떻게 생각했는지. 네가 지금까지 혼자 짊어지고 있는 그 죄책감이 정말 맞는 건지."


서연이 『서은영의 기억』을 집어 들었다.


"용기 있게 봐. 진실을 확인해 봐."


한울이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 들었다.


"은영아... 네가 뭐라고 할지 무서워. 하지만..."


그는 책을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읽어볼 작정이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제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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