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도서관』

소설

by 산들강바람

## 1장: 기억 도서관의 마지막 사서


서연은 창가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서가들을 바라보았다. 80년. 그녀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1945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머물 줄은 몰랐다.


"오늘도 열심히 일하네."


그녀의 시선이 아래층에서 기억서들을 정리하고 있는 한울에게 향했다. 28세의 청년. 6개월 전 이곳에 온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일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서연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수많은 영혼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어떤 이는 금세 깨달아 떠났고, 어떤 이는 수십 년을 머물다 갔다. 하지만 한울은 달랐다. 이 아이만큼 자신을 철저히 속이는 영혼은 처음이었다.


'이 아이가 깨달으면... 나도 드디어 갈 수 있겠구나.'


서연의 손끝이 희미하게 투명해지고 있었다. 80년의 시간이 그녀를 충분히 정화시켰다. 이제 한 가지만 남았다.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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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선배님, 이 기억서는 어디에 꽂아야 할까요?"


한울이 손에 든 책을 들어 보였다. 『김철수의 기억』이라고 쓰인 갈색 표지의 책이었다. 두께로 보아 70년 정도를 산 사람의 것 같았다.


"생년월일을 확인해 봐."


"1940년생... 2023년에 돌아가셨네요."


"그럼 1940년대 구역이야. 3층 서쪽 끝에 있어."


한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서연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6개월 동안 수천 권의 기억서를 정리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선배님, 신기해요."


한울이 내려오며 말했다.


"뭐가?"


"이 김철수라는 분... 책을 만져보니까 어떤 삶을 사셨는지 조금씩 느껴져요. 한국전쟁 때 열 살이었는데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셨더라고요. 그래도 결국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사셨어요. 마지막엔 손자들한테 둘러싸여서 편안하게 가셨고..."


"그래?"


"네. 참 따뜻한 인생이었어요."


서연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한울에게는 특별한 공감 능력이 있었다. 기억서를 만지면 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피하고 있었다.


"한울아."


"네?"


"너는 언제부터 여기서 일하고 싶었니?"


한울이 잠시 멈칫했다. 그의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스쳤다.


"그게...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어느 순간 여기 있었던 것 같고... 이 일이 제게 맞는 것 같아서 계속하고 있어요."


"가족은?"


"가족..."


한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잘 모르겠어요. 뭔가 중요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네요."


거짓말이었다. 서연은 알고 있었다. 한울이 매일 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한다는 것을. '은영아'라는 이름을.


"그래도 언젠가는 기억날 거야."


서연이 말했다.


"그런가요?"


"응. 하지만 그때가 되면 많이 아플지도 모르겠어."


한울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서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서두르면 안 되었다. 80년 동안 수많은 영혼들을 지켜보며 배운 것이 있다면, 각자에게는 각자만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님."


"응?"


"여기서 일하는 사서들은 언제까지 있을 수 있어요?"


서연이 한울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의미 있는 질문을 한 것 같았다.


"글쎄... 필요한 만큼?"


"필요한 만큼이요?"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만큼. 어떤 사람은 짧게, 어떤 사람은 길게. 그건 스스로 정하는 거야."


한울이 무언가 더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마침 새로운 기억서들이 도착했다. 관리인이 가져다 놓은 상자 안에는 스무 권 정도의 책이 들어있었다.


"오늘 할 일이 또 생겼네."


한울이 상자에 다가가 첫 번째 책을 꺼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


『서은영의 기억』


한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책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한울아?"


서연이 다가가려 했지만, 한울은 뒤로 물러섰다.


"이건... 이건 뭐죠?"


"기억서야. 다른 것들과 똑같은."


"아니에요. 이 이름... 이 이름을 어디서 본 것 같아요."


한울이 떨리는 손으로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책표지를 만진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상해요. 왜 이렇게...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죠?"


서연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드디어 시작되는 것 같았다. 80년을 기다린 이 순간이.


"한울아."


"네?"


"그 책... 오늘은 그냥 두는 게 어떨까? 내일 다시 보자."


한울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 『서은영의 기억』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날 밤, 서연은 창가에서 한참 동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80년 전, 자신도 이런 밤이 있었다. 잃어버린 아들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 순간이 자신의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내일부터 한울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서연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먼 곳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가야 할 곳이 있는 바람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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