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서랍』

소설

by 산들강바람

10장

편지를 모두 읽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55년 전의 3년 반을 하룻밤에 따라간 셈이었다.

나는 편지들을 다시 날짜순으로 정리했다. 첫 번째 편지의 떨리는 고백부터 마지막 편지의 체념 어린 이별까지. 한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모든 과정이 거기에 있었다.

박민철. 이 사람은 정말로 엄마를 사랑했었구나. 그리고 엄마도 분명 이 사람을 사랑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헤어진 걸까? 정말 다른 남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집안의 압력 때문이었을까? 3년이라는 군복무 기간이 너무 길어서였을까?

갑자기 엄마가 더 궁금해졌다. 평생 알고 지낸 우리 엄마가 아니라, 18세의 김순희가. 박민철을 사랑했고, 그와 결혼을 약속했던 그 소녀가.

그리고 그 소녀는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까? 정말로 마음이 변한 걸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혹시라도 박민철이라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11장

'박민철'이라는 이름은 너무 흔했다. 수백 명의 검색 결과가 나왔다. 나이와 지역을 좁혀서 다시 검색해 봤다. 1950년생, 부산 출신, 서울 거주.

한 시간 넘게 검색한 끝에 드디어 그럴듯한 결과를 찾았다. 부산일보 부고란에서였다.

'고 박민철(73세) 씨 별세

부산 중구 출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건설 상무 역임


2019년 11월 3일 폐암으로 별세'


가슴이 철렁했다. 벌써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니. 부고 내용을 더 자세히 읽어봤다.

'유족: 부인 최영희, 아들 박준호, 딸 박미경'

부인이 있었다. 자식들도 있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 엄마의 첫사랑 박민철일까?

나는 용기를 내서 박준호라는 이름을 다시 검색해 봤다. 다행히 회사 홈페이지에서 연락처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 나는 박준호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아버님이 박민철 씨이신가요?"

"네, 그런데..."

"죄송합니다. 저는 이수진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아버님께서 부산에서 김순희라는 분을 아셨는지 궁금해서 전화드렸어요."


전화기 너머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김순희... 혹시 어머님 성함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평생 그리워하셨던 분이시네요."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어요. 젊었을 때 정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군대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다고. 그분 이름이 김순희였어요. 평생 잊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12장

박준호 씨와의 통화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민철 씨도 평생 엄마를 잊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신 후에도 가끔 김순희 이야기를 하셨어요. 물론 어머니 몰래였지만요. 첫사랑은 잊을 수 없다고, 그 시절이 가장 순수했다고 하시면서."

"그럼 아버님께서는 저희 어머니를 다시 만나보려고 하신 적은 없나요?"

"한 번 있었어요. 10년 전쯤에 부산에 내려가서 찾아보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결국 포기하시더라고요. 이미 가정을 이룬 상황에서 과거를 들춰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나는 요양원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계속 생각했다. 박민철도 평생 엄마를 그리워했다니.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가정을 이루며 살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18세 때의 첫사랑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엄마가 돌아봤다. 오늘은 나를 알아보는 날인 것 같았다.


"수진아, 왔구나."

"네, 엄마."


나는 엄마 옆에 앉아서 가방에서 편지들을 꺼냈다. 빨간 고무줄로 묶인 노란 봉투들.


"엄마, 이거 뭔지 아세요?"


엄마가 편지들을 보더니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이게... 어디서..."

"엄마 서랍에서 찾았어요. 박민철 씨가 보낸 편지들이죠?"


엄마의 손이 떨렸다. 편지를 만지면서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민철이가... 민철이가 편지를 보냈구나."

"엄마, 이 분을 사랑하셨죠?"


엄마가 나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사랑했지. 정말 많이."

"왜 헤어지신 거예요?"


엄마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려웠어. 그 시절에는...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단다. 집안도 반대했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2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

"그래도 기다리실 수 있었잖아요."

"처음에는 기다렸지. 하지만... 네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분이 더 안정적이었어. 집안도 좋았고, 당장 결혼도 할 수 있었고."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때는 그게 맞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평생 미안했어. 민철이에게도, 너희 아버지에게도."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박민철 씨도 엄마를 평생 그리워하셨대요. 3년 군복무가 너무 길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였죠."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정말?"

"네. 그런데 안타깝게도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편지를 꼭 안고 울기 시작했다. 55년 만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나는 첫 번째 편지를 꺼내서 엄마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순희야, 오늘 네가 웃으며 민철아, 안녕이라고 인사해 줬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엄마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편지를 읽어주는 내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마치 55년 전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날 오후, 나는 엄마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랑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은 잊혀도 마음은 남는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그런 사랑의 흔적들이 우리에게 삶의 진짜 의미를 가르쳐준다는 것을.

엄마의 서랍 속에서 찾은 것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청춘이었고, 사랑이었고, 그 모든 것을 간직하며 살아온 한 여자의 인생이었다.

나는 이제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순희였던 시절의 엄마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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