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969년 여름. 민철의 첫 방학이었다.
'순희야,
첫 방학이다! 내일 부산행 기차를 탄다. 3개월 만에 너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온다.
그동안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조금 모았다. 너에게 줄 선물도 샀어. 은반지야. 비싸지는 않지만 내 마음을 담았다.
내일 오후 3시 부산역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1969년 여름 편지들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함께 보낸 한 달, 해운대에서의 데이트, 가족들에게 소개받은 이야기들. 모든 것이 행복해 보였다.
'순희야,
네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좀 엄하셨지만, 어머니께서는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공부 열심히 하라"라고 하시더라.
우리가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아. 이제는 숨어서 만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연애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가을 편지부터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순희야,
네 아버지께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지난번에 인사드렸을 때의 표정이 계속 신경 쓰인다.
내가 아직 대학생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서울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언젠가는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지금은 조금 힘들다.'
1969년 겨울부터 1970년 봄까지의 편지들은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순희야,
오늘 전화통화에서 네 목소리가 우울해 들렸다. 혹시 집에서 뭔가 일이 있었니? 부모님께서 우리 관계에 대해 뭔가 말씀하신 건 아니야?
나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 꼭 책임지겠다는 마음뿐인데... 어른들은 왜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걸까.'
1970년 1월의 편지.
'순희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올해는 우리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
네 아버지께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내용은... 우리가 너무 어리다는 것, 그리고 집안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많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너를 포기할 수는 없어.'
편지를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한 현실의 벽들. 집안 차이, 경제적 문제, 사회적 편견들.
1970년 여름 편지는 더욱 절망적이었다.
'순희야,
요즘 너와의 전화에서 뭔가 달라진 느낌을 받는다.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아니면 정말로 뭔가 변한 건가?
우리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줘.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이겨낼 수 있다고.'
1970년 12월. 민철의 입대를 앞둔 편지였다.
'순희야,
드디어 입대 통지서가 나왔다. 1971년 1월 15일 논산훈련소 입소.
2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군대를 다녀와야 우리가 당당하게 결혼할 수 있을 테니까.
부탁이 있어. 3년 동안 나를 기다려줘.'
입대 직전의 편지.
'순희야,
내일이면 입대다. 어젯밤 부산에 내려가서 너를 만나고 왔다.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 네가 우는 모습을 보니까 내 마음도 찢어질 것 같았다. "기다릴게"라고 말해준 네 약속을 믿는다.'
그다음 편지들은 훈련소에서, 그리고 부대에서 온 것들이었다.
'순희야,
훈련소 생활이 정말 힘들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밤 9시에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가장 그리운 건 역시 너야. 네 사진을 보며 버티고 있어.'
1971년 봄부터 편지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순희야,
요즘 네 편지가 예전 같지 않다. 뭔가 형식적인 느낌이 들어.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그리고 지난번에 전화했을 때 목소리도 많이 피곤해 보였어. 혹시 아픈 건 아니야?'
'순희야,
이번 달에는 편지가 한 통밖에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부대 생활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멀어져 가는 건 정말 힘들다.'
편지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민철의 편지는 더욱 간절해졌지만, 순희의 답장은 줄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편지는 1971년 8월에 쓰인 것이었다. 다른 편지들보다 훨씬 짧았다.
나는 그 편지를 펼치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이것이 55년 전 사랑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순희야,
이 편지가 내가 네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다.
어젯밤 네 친구 영미를 통해 들었다. 네가 다른 사람과 선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라는 이야기도.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우리의 약속을, 너의 그 "기다리겠다"는 말을 믿고 싶었어. 하지만 이번 달에 편지도 전화도 없었던 네 모습을 생각해 보니... 아, 정말인가 보다.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3년이라는 시간이 너에게는 너무 길었을 거야. 그리고 나보다 더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났겠지.
사실 네 아버지 말씀이 맞았던 것 같다. 우리는 너무 어렸고, 현실을 몰랐어. 사랑만으로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다는 것을.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너와 함께했던 3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이제 나는 너를 보내주려고 한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
사랑했다.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아마 평생 너만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행복해줘, 순희야.
안녕.
민철이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55년 전에 끝난 사랑 이야기에 이렇게 마음이 아플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