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서랍』

소설

by 산들강바람

프롤로그

"순희야."


엄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 이름은 수진이다.


"순희야, 오늘은 민철이가 편지를 가져왔니?"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주름진 손등에는 링거 자국이 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엄마, 저 수진이예요."


엄마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순희는 어디 갔지?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순희. 엄마의 옛 이름이었다. 결혼하기 전 김순희. 나는 엄마가 그 이름으로 불렸던 시절을 알지 못했다. 그저 내게는 언제나 '엄마'였을 뿐이다.


"민철이가 기다리고 있는데... 편지를 가져왔다고..."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1월의 오후 햇살이 엄마의 허연 머리카락을 비추고 있었다.

민철이? 그게 누구지?

그때는 몰랐다. 그 이름이 내가 평생 몰랐던 엄마의 비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틀 후, 엄마의 서랍 속에서 55년 전 사랑의 증거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1장

엄마의 서랍은 예상보다 무거웠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정리 작업이었지만, 벌써 오후 2시가 넘었다. 요양원 입원을 앞두고 엄마의 25년 된 아파트를 비워야 했다.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나누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핸드폰이 울렸다. 또 요양원에서였다.


"수진님, 어머님께서 자꾸 집에 가시겠다고 하세요. 오늘도 새벽부터..."


"알겠습니다.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이제 나를 알아보는 날보다 모르는 날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만은 또렷했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집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서랍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위쪽 두 칸은 이미 정리했다. 속옷과 양말들, 오래된 스웨터들. 기껏해야 몇 벌 안 되는 옷가지들이 칸마다 정성스럽게 개켜져 있었다. 엄마다운 모습이었다.

마지막 남은 건 맨 아래 칸. 다른 칸보다 깊고, 손잡이도 뻑뻑했다. 평소에 거의 열지 않는 곳인 듯했다.


"어?"


힘을 주어 당기자 서랍이 갑자기 빠지면서 내용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낡은 수첩들, 병원 진료기록들, 그리고...

노란 편지봉투들.

빨간 고무줄로 단단히 묶인 편지 뭉치였다. 50통은 족히 넘어 보였다. 봉투 위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김순희 양 귀하'라고 적혀 있었다.

김순희. 엄마의 결혼 전 이름이었다.

발신인란을 보았다. '박민철'.


"민철이가 편지를 가져왔니?"


이틀 전 요양원에서 들었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이 사람이...?

편지봉투를 들어 올렸다. 누렇게 바랜 종이가 손끝에서 부서질 듯 얇았다. 소인을 확인해 보니 1968년, 1969년, 1970년...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었다.

고무줄을 조심스럽게 풀고 편지 하나를 꺼냈다. 만년필로 정성스럽게 쓴 글씨가 한 줄 한 줄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순희야,

오늘 네가 웃으며 "민철아, 안녕"이라고 인사해 줬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손이 떨렸다. 연애편지였다. 그것도 내가 전혀 몰랐던 누군가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접어 넣었다. 이걸 읽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엄마는 이제 이 편지들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나는 편지 뭉치를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고 엄마의 방을 나왔다.


2장

지하철 2호선은 평소보다 붐볐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꼭 안고 서 있었다. 편지들이 부서질까 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집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편지 뭉치를 거실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것이었다. 빨간 고무줄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부엌에서 물을 한 컵 마시고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편지들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현실이었다.

박민철. 이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과거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편이었다. 아버지와 어떻게 만났는지, 연애는 어떻게 했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그냥 만나서 결혼했지, 뭘."


언젠가 물어봤을 때 엄마가 했던 대답이었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더 궁금했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무줄을 풀었다. 편지봉투들이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1968년 3월. 가장 최근 것은 1971년 8월. 약 3년 반 동안의 기록이었다.

첫 번째 편지를 꺼냈다. 봉투에서 편지지 두 장이 나왔다. 연한 하늘색 편지지에 만년필로 쓴 정성스러운 글씨.


'순희야,

오늘 네가 웃으며 "민철아, 안녕"이라고 인사해 줬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사실 어젯밤부터 오늘 너에게 뭐라고 말을 걸까 고민했는데, 네가 먼저 인사해 줘서 너무 기뻤다.

3학년이 되어서 같은 반이 된 것도 운명인 것 같다. 작년에는 너와 말 한 번 못 해봤는데, 이제는 매일 볼 수 있으니까.

내일은 용기를 내서 점심시간에 말을 걸어봐야겠다. 너는 어떤 책을 좋아하니? 나는 요즘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읽고 있다. 너도 좋아한다면 같이 이야기해 볼 수 있을 텐데.

아, 그리고 오늘 네가 입은 노란색 원피스가 정말 예뻤다. 너에게는 봄 같은 색깔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편지로 쓰고 있으니 얼굴이 빨개진다. 하지만 직접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워서...

언젠가는 이 편지를 네게 줄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너를 생각하는 민철이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이 우리 엄마라니. 김순희라는 이름의 17세 소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민철아, 안녕"이라고 인사했던 그 사람이.

두 번째 편지를 펼쳤다.


'순희야,

오늘 도서관에서 너와 함께 공부한 2시간이 꿈같았다. 네가 수학 문제를 풀 때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예쁘더라. 가끔 연필을 입술에 대고 생각하는 습관도 귀엽고.

나는 네가 옆에 있으면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된다. 공부는 뒷전이고 네 얼굴만 힐끗힐끗 보게 되어서 우리 담임선생님이 보면 혼날 것 같다.

내일은 봄소풍이다. 같은 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어젯밤부터 기도하고 있다...'


나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사랑을 받았던 엄마를, 이런 감정을 품고 살았던 17세의 김순희를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9시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편지는 아직 40 통도 넘게 남아있었다.

박민철. 이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엄마와 결국 어떻게 된 걸까? 왜 아버지는 박민철이 아니라 이병수였을까?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답은 모두 이 편지들 속에 있을 것이었다.

나는 세 번째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마치 55년 전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 같았다. 내가 전혀 몰랐던 엄마의 젊은 시절로.


3장

두 번째, 세 번째 편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1968년 봄과 여름의 이야기였다.


'순희야,

오늘 봄소풍에서 네가 나를 위해 김밥을 나눠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벚꽃나무 아래에서 너와 함께 도시락을 먹을 때, 꽃잎이 네 머리카락에 떨어진 것을 봤다. 말해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너무 예뻐서.'


'순희야,

드디어 말했다! 오늘 방과 후 교실에서 "순희야, 나는 너를 좋아한다"라고.

네가 빨개진 얼굴로 "나도..."라고 말했을 때,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아직 어색하지만 너무 행복하다.'


편지를 읽으면서 1968년의 부산이 눈앞에 그려졌다. 고등학교 3학년 교실, 벚꽃이 피는 운동장, 방과 후 도서관. 그곳에는 17세의 김순희가 있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박민철이 있었다.

여름 편지들은 더욱 달콤했다.


'순희야, 오늘 본 <졸업>이라는 영화가 참 좋았다. 더스틴 호프만이 나온 그 영화 말이야. 나중에 우리도 대학생이 되면 저렇게 멋있게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순희야, 네가 추천해 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 읽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구절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시간이 흐를수록 편지의 내용은 더욱 진지해졌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편지에 담긴 순수함이었다. 요즘의 연애와는 다른, 그 시대만의 조심스러움과 정성스러움이 느껴졌다.


4장

1969년 2월. 졸업을 앞둔 편지가 나왔다.


'순희야,

이제 정말 졸업이다. 1년 동안 너와 함께한 시간들이 꿈같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고, 너는 부산에 남아 일을 한다고 했지? 멀어지겠지만 우리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야. 매주 편지를 쓸 것이고, 방학마다 부산에 내려올 거야.

2년 후, 내가 군대를 다녀오면 바로 결혼하자. 너의 부모님께도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싶다.'


나는 편지를 잠시 내려놓았다. 결혼? 18세에 이미 결혼을 약속했다니. 그 시대에는 그런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나?

서울에서 온 첫 번째 편지는 3월 둘째 주였다.


'순희야,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하숙집은 조금 좁지만 깨끗하고, 하숙집 아주머니도 친절하시다. 대학교는... 정말 크다. 부산의 우리 고등학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설다. 사람들의 말투도 다르고, 생활 방식도 다르다. 가끔 무척 외로울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너를 생각한다.'


장거리 연애의 시작이었다. 200킬로미터 떨어진 서울과 부산. 지금은 KTX로 3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그때는 얼마나 멀게 느껴졌을까.

편지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그리움과 사랑.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 그런 것들이 편지 행간 사이에서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였다. 몇 장의 끝에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 박민철이라는 첫사랑이 있었고, 그들은 정말로 사랑했으며, 심지어 결혼까지 약속했었다는 것을.

하지만 결국 그들은 헤어졌고, 엄마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답은 아마 남은 편지들 속에 있을 것이다.

나는 1969년 여름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이야기의 시작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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