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하루를 잠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된 컴퓨터가 완전히 부팅될 때까지 걸리는 약 2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글을 올리고 쓰러진 게 아침 8시였고, 눈을 뜬 것은 오전 9시 27분이었다. 얼마 안 잤네, 더 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킨 미도는 허리와 등, 그리고 머리를 베고 있던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근육통에 풀썩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오랫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아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몸이 비명을 질렀다.
"이런 미친."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시간과 신체로 느끼는 체감 시간의 괴리감에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굴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날짜를 확인했다. 그러자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1시간 27분을 잔 것이 아니라 23시간 27분을 잔 것이었고, 그 사이 휴대폰에는 이런 저런 연락이 제법 많이 쌓여있었다. 그다지 영양가 있는 연락은 없을 테지만,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다.
카톡이 여러 건 누적되어 숫자 옆에는 +표시가 추가되어 있고, 메일함에는 예전에 등록해둔 구직 사이트에서 온 광고메일이 4건, 의미 없는 스팸 메일이 8건, 끈질기게 대학에서 동문에게 보내는 메일이 1건 쌓여있었다. 02, 070, 031로 시작하는 쓸데없는 부재중 전화가 대략 10건, 그리고 그 사이에 054로 시작하는 번호가 한 개 찍혀있다. 젠장.
다른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었는지 번호는 달랐지만, 지안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분명했다. 그런 전화가 온 줄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잤으니. 참담함에 미도는 한숨을 길게 늘어뜨리며 카톡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수신 거부를 체크했는데도 왜 광고 문자는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오는 건지. 그나마 유용할지 모르는 가게의 광고 문자만 '읽음' 상태로 바꾸고 나머지는 전부 차단했다. 그렇게 광고를 먼저 정리하고 몇 안 되는 지인들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 12월에 강릉 여행 갈 사람? 공감 표시 바람 ]
퇴사한 직장의 동료들과 만든 단체방에 오랜만에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다들 정이 깊어서 아직도 분기별로 돌아가며 한 번씩 만나자는 연락을 보낸다. 타인에게 살갑게 구는 것을 힘들어하는 미도에게 몇 안 되는 소중한 정기 모임 중 하나다.
[ 언제 집에 오니, 딸. ]
그러고 보니 최근 지안에게 정신이 쏠린 탓에 부모님께 연락을 소홀히 했다. 원래 부모님 집에 자주 가는 효녀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 '조만간 들를게요.' 귀여운 곰이 연신 사과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을 보낸다.
[ 다음주 수요일에 소묘 수업 끝나고 점심 먹자. ]
메시지창 오른쪽 가장자리에 표시된 메시지 수신 시각은 오후 6시 18분. 그리고 그 아래 빨간 동그라미 안에 숫자 '2'가 적혀있다. 미도는 그제야 어제저녁 팝업창에 뜬 정아가 보낸 메시지의 앞부분이 기억났다. 의도치 않게 메시지를 무시한 꼴이 되었지만 부재중 전화 목록에 정아가 없었으니 본인도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했다.
"하루가 사라졌네. 뿅, 마법처럼."
정아의 명랑한 말투를 흉내 내며 혼잣말을 해본다. 이제 소리라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집에서 목소리는 금세 흩어진다. 적막함. 쓸쓸함. 고요함. 지금 상황에 어울릴법한 단어들을 읊으면서 미도는 삐걱대는 몸을 일으켰다.
슬슬 가동되기 시작한 위장이 어서 먹을 것을 집어 넣으라고 시위하듯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우르르 쾅쾅. 뱃속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정말 날 수 있는 거였구나. 생각해보니 금요일 아침부터 지금까지 입에 넣은 음식이라고는 다 커피 뿐이었다. 팔다리를 쭉 뻗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미도는 배달 앱을 열었다. 몸은 찌뿌둥했지만 푹 잔 덕분에 머리는 맑게 개었다.
마라탕... 먹을까.
주문 내역에 들어가니 지안이 주문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재주문 버튼을 누르려 하니 아직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았다. '시간관념이 맛이 갔네, 바보 아냐.' 자조하며 미도는 차라리 깨끗이 씻고 카페에 가서 간단히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세트를 먹기로 결정했다. 정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카페에서 10시 30분까지 브런치 세트를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전은 보통 잠으로 보내거나 일어나더라도 식사를 딱히 하지는 않았기에, 카페 앞 입간판에 쓰여있는 홍보 문구를 보면서 언젠가는 먹어야지-하면서 차일피일 미뤄왔다.
"침 흘리며 잤나 보네. 대박이다. 정말."
세면대 앞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미도는 푸석푸석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퉁퉁 부은 얼굴이 꼭 고3 때의 얼굴을 생각나게 한다. 그 누구도 먹는 데에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 인생 최대의 몸무게를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시기. 그때에는 쌍꺼풀이 없어서 눈이 작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무 살을 넘기자 자연스레 젖살이 빠지면서 눈이 커졌다. 왕방울만 한 눈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편은 아니니 만족.
고개를 숙여 따뜻한 물을 얼굴에 끼얹자 건조한 얼굴의 표면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자신을 너무 돌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세수만 하고 아침을 먹은 뒤 목욕탕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정아에게 어떻게 답을 하면 좋을지는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면서 고민해 봐야지. 그렇게 걱정거리를 하나 미룬다. 지안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는 저녁 5시경. 전날 전화를 한 시각과 비슷했다. 그러니 만약 전화가 오더라도 비슷한 시각에 올 것이 틀림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책. 정말 어디에 둔 거지."
나가는 김에 N과의 추억이 깃든 박스를 버리려 하니 청록색 책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작업실에서 거실까지 짧은 거리를 옮기는데도 상자는 제법 묵직했다. 여기에 책이 하나 더해진다 해도 상자의 무게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겠지만, 벽돌이 하나 얹어져 있는 것처럼 답답한 마음에는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온종일 집을 정리했는데 책이 사라지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기왕 가져다 버리는 거 모두 한꺼번에 상자에 담아서 버리고 싶은데.
날씨를 확인하니 밤사이 온 비로 기온이 더욱 내려가 제법 쌀쌀할 듯했다. 무늬가 없는 얇은 검은색 긴팔 티셔츠에 지안과 커플로 맞춘 두꺼운 회색 체육복 세트를 챙겨입고 미도는 주머니에 휴대폰과 카드지갑을 쑤셔 넣었다. 떡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짙은 남색의 스냅백을 푹 눌러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을 나서며 생각해보니 이 모자도 지안이 길가다 선물해준 것이었다. 어릴 때 캡 모자를 썼다가 두통이 생겨 고생한 이후로 다시는 쓰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지안이 스냅백은 다를 수도 있다며 사준 것이었다. 빳빳한 일자 모양의 챙을 가진 스냅백을 쓴 자신의 모습이 어색해서 잘 쓰지는 않았지만, 지안은 스냅백 쓰는 것을 좋아했기에 데이트를 할 때 가끔 가방에 따로 챙겨가서 사진을 찍을 때만 쓰곤 했다.
전화가 온 것으로 보아서는 아직은 여지가 있는 거겠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카페로 가는 길.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초조함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나는 항상 뒤늦게 후회하는 걸까. 왜 항상 내 욕심을 먼저 채울 생각을 할까.
대략 반년 동안 화요일 저녁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애인에 대해 지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이켜보면 지안은 단 한 번도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온라인 스터디를 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는 했지만 의구심을 가진 적이 과연 없었을까. 내가 지안이였다면, N을 대하던 나였다면 어땠을까. 분명 궁금해 미쳐버렸을 게 분명하다. 어떤 스터디인지, 멤버는 어떻게 되는지, 언제까지 하는 건지. 간접적으로라도 알아내려고 용을 썼을 것이다. 은연중에 '빠나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처럼. 하지만 지안은 스터디를 하게 되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손님?"
"아, 저 브런치 세트 하나 주세요. 먹고 갈게요."
"아메리카노는 아이스로 드려요, 핫으로 드려요?"
"아이스로 주세요."
쌀쌀하지만 빨리 배 속에 집어넣으려면 아이스가 제격이다. 멍하니 카운터에 깔린 메뉴판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주문을 한 후 종업원에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목소리가 다른데. 주말에는 알바생을 쓰는 건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호기심이 동해서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커피 머신을 향해 뒤를 돌아있다. 곱슬곱슬한 긴 머리카락. 혹시 지하철에서 봤던 그 학생일까? N을 많이 닮았던 그 학생.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첫사랑을 다시 파헤친 그 학생. 머신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알바생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미도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바닥에서 벌레라도 발견한 것처럼.
끝까지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지안과의 관계가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겨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만에 하나 그 학생이 맞다 해도 이제 와 확인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볼 것도 없는 휴대폰을 괜히 만지작만지작 거리면서 미도는 샌드위치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선으로 잘려 세모꼴을 한 샌드위치 사이에는 얇게 슬라이스 된 햄, 에그 샐러드, 양상추가 적당히 들어있었다. 맛있겠다. 침을 꼴깍 삼키며 미도는 트레이에 담긴 소박한 아침상을 받아서 들고 카운터가 보이지 않는 복도 안쪽의 1인석에 앉았다.
샌드위치는 내용물이 소박한 것이 좋아. 괜히 이것저것 많이 들어있으면 흘리게 되잖아. 그게 너무 싫어.
누가 한 말이었더라. 지안이었나, N이었나. 샌드위치는 금방 뱃속으로 들어갔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먹성이 터져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켜버렸다. 아메리카노도 금세 바닥이 나서 공기와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커피가 빨대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그렇게 허겁지겁 먹고 나니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뱃속에는 포만감이 찾아왔지만 기껍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트레이를 정리하며 미도는 의식적으로 알바생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미도 다음에 온 테이크아웃 손님을 마지막으로 가게는 한산해졌기에 이제 카운터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아마 SNS를 확인하면서 내가 나가는지 타이밍을 재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짐작하며 미도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무게를 실어 앞으로 밀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안녕히 가세요'하고 말하는 알바생의 목소리가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