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생활은 상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현실은 기대와 달리 냉담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실망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꼭 반에서 겉도는 사람이 한 명은 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였다. 그리고 대학 생활에서도 나의 교우 관계에는 실패의 조짐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도저히 단체 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아서 기숙사는 애당초 신청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국립대학교에 입학한 덕분에 부모님께서는 별다른 말 없이 자취방을 얻어주셨다. 보증금 4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은 필요한 요소를 모두 압축해 둔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다.
신발 두 켤레를 겨우 둘 수 있는 작은 현관과 나의 보금자리인 방 사이에는 좁고 짧은 복도가 있고, 그 복도를 따라 복잡한 조리 따위는 절대 할 수 없는 작은 싱크대와 미니 냉장고가 놓여있었다. 감사히도 부엌과 방을 분리해 주는 미닫이문을 열면 본가의 내 방과 비슷한 크기의 방이 나왔다. 옷장은 따로 있지 않아서 2단 행거를 벽면에 설치해 두었고, 빈 곳에 대충 옷과 이불이 든 상자를 쌓아두었다. 베란다도 작게 있었기에 세탁물을 널어둘 공간이 있어서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당연하게도 집을 보는 눈이 없는 나는 네네, 그렇게 대답하면서 어머니가 골라주신 이 집에 적응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학기가 시작하기 일주일 전에 일찌감치 입주했다.
집을 떠나 혼자 살게 되면 마냥 설렐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을 첫날 밤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낯선 도시, 낯선 장소, 낯선 냄새, 낯선 소리. 예민해진 청각, 후각, 촉각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은 소름이 끼치는 감각에 이불을 풀썩거리기도 여러 번. 기본 가구로 구색만 맞춰둔 방에서는 소리가 왜 이렇게 반사되어 울리는지. 결국 나는 머리맡에 둔 휴대폰에 손을 뻗었다. 어릴 때 이후로 이렇게 어둠이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 ㅠㅠ 잠을 잘 수가 없어 ]
새벽 3시. 사실 방금전까지 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괜찮았다. N과 함께 게임에서 사냥도 하고 수다도 떨며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독립 첫날은 기분이 묘할 거라고 나를 걱정하는 N에게 자취방이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안락하고 포근하다며, 눈치 안 보고 게임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경솔했어. 그렇게 후회하면서도 나는 N에게 징징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내가 말했지! ㅋㅋㅋ 미도는 외로움을 잘 타니까,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어. ]
문자를 보내고 약 1분 뒤, N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말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문자를 주고받으며 예민하던 감각들이 차분히 가라앉았고, N의 답장을 기다리다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N의 자취방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 휑한 벽을 장식할 물건들을 사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인터넷 검색을 통해 블로그 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보았다. 역시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 입니다.'라는 문구가 화면에 떠올랐다. 폴더를 겹겹이 엮어 깊숙한 곳에 숨겨둔 즐겨찾기를 통해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역시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 입니다.'라는 문구가 화면에 떠올랐다. 다시 주소창에 블로그 주소를 알파벳 하나하나, 차근차근, 일일이 곱씹어보며 입력해 보았다. 역시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 입니다.'라는 문구가 화면에 떠올랐다.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N의 블로그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 삭제한 거겠지? 아마도. 그런데 왜? 내가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나? 방문자 기록을 볼 수도 있을 테니 로그인하고 들어온 적이 없는데. 몰랐을 거야.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 잠깐만. 나 지금 정리 중이었잖아. 근데 왜 이런 생각을 해? 하지만 궁금하기는 하잖아. 갑자기 정기적으로 올리던 글이 안 올라 오지를 않나, 이젠 블로그가 아예 없어져 버렸어. 잊어버리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벌을 받은 걸까. 이렇게 정리 다 한다고 지안이가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모르겠다. 모든 게 엉망이네.
"아, 졸려."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린 채 작업실 책상에 앉아있던 미도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창 너머에 짙게 내린 어둠을 바라보니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한 하루는 너무나도 길었다. 정아에게 지안에 대한 이야기를 오전 내내 듣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홀린 듯이 청소를 하면서 몸을 혹사한 탓에 체력은 완전히 방전되었다. 게다가 N의 블로그가 사라졌다는 충격이 몸을 덮쳤다. 쓰나미 같은 피로가 온몸을 덮쳐온다. 그런데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머리는 이미 꿈속을 거니는 것처럼 몽롱해지고 눈꺼풀은 무게추가 달린 것처럼 무겁다.
하지만 어떻게든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자꾸만 떨어지는 미도의 고개를 끌어 올린다. 이대로는 정말로 잠들어버릴 것 같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영화에 나오는 좀비처럼 발을 질질 끌며 부엌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커피를 내려서 마시기로 결정하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싱크대 위의 찬장 한쪽에 선물로 받은 각종 티백과 커피믹스가 담긴 박스가 원두가 들어있는 봉투 옆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아니, 그냥 커피믹스나 마실까. 달콤하게 맥심 두 개. 우유도 넣으면 배도 적당히 차겠지.
종일 먹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상기시키듯 위장이 아우성을 친다. 미도는 그릇과 컵이 켜켜이 쌓인 식기 건조대를 뒤적거려 물기가 거의 사라진 머그잔 하나를 꺼냈다.
인스턴트 커피는 참 편리하다. 뜨거운 물만 부어주면 완성되는 이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낸 누군가에게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낸다. 사실 드립커피를 마시기 전까지 미도에게 커피는 늘 맥심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달콤한 커피보다는 프림이나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블랙커피를 찾게 되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입맛이라는 건 참 신기하단 말이지. 최소한의 물로 녹인 커피 알갱이가 바닥에 깔린 머그잔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를 적당히 부으며 (너무 많이 넣으면 맛이 없다.) 미도는 어릴 적 아주 싫어하던 날생선을 지금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비단 먹는 것 뿐만이 아니다. 과거에 싫어하던 것을 현재에는 열렬히 좋아하는 것처럼, 과거에 없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 온 마음을 바쳤던 것을 이제는 증오의 감정으로 바라보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N을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걸까. 달콤한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리며 미도는 책상 앞에 앉았다. 여전히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그래도 카페인이 졸음을 약간 걷어내 준다.
"후우. 그럼 써볼까."
화면에 떠 있는 의미 없이 나열된 단어들을 깨끗이 지우고 미도는 키보드를 맹렬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물론 수신인의 이름은 철저히 숨겨진, 사실 편지라기 보다는 고해성사에 가까운 글을.
내일 오전 9시. 에세이가 미도의 개인 페이지에 업로드 되면 지안은 분명 가장 먼저 이 편지를 읽어줄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3월 중순. 자취방은 심야 전기를 사용했기에 크게 난방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한기가 감돌았다. 어설프게 어른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대학교에서 익숙해진 것은 강의실의 위치 뿐 여전히 모든 게 낯설었다.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따위는 없음. 학과에서 나오는 중요한 공지는 알아서 수시로 게시판을 확인할 것. 교수님은 결석 사유에 관심을 두지 않음. 과제 마감 기한 및 시험 기간은 알아서 확인하고 대비할 것. 근로장학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마자 신청 기간은 이미 지났음.
가만히 있어도 모든 정보가 흘러들어오고 정해진 일과대로 움직여야 했던 고등학교와는 180도 다른 대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나에게 쉽지 않은 과제였다.
게다가 아직은 상투적인 대화라도 이어가고 있지만 대학 동기들과 내가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관심사는 대학 동기들에게 비주류로 인식되는 것들뿐이었고, 그래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대화에 끼는 것도 어려웠고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대학교에 가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인다는 글을 보았는데, 그 글을 다시 찾게 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비난하는 코멘트를 남기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억지로 무리에 끼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에 맞춰 대학 생활을 즐겼으면 되었을 텐데,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이 서툰, 여전히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고등학교 4학년일 뿐이었다. 이윽고 무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강의실에 오도카니 혼자 앉아있게 되었을 때, 나는 N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은 있어서 태연한 척, 허세가 가득한 문자를 보냈다. 혼자 다니는 게 편한 것 같아. 혼밥 최고! 괜히 안 맞는 사람이랑 친해지려고 감정 소모하는 게 싫어. 투정이 분명한 그따위 말들에도 N은 성실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1학년의 시간표는 적응을 명목으로 수업이 적었고 당연히도 공강이 많았다. 학기 초에는 나름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고 과제도 미리미리 하는 성실한 학생의 삶을 살기로 다짐했는데 말이지.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24시간은 오롯이 내가 통제해야 할 영역이 되었고, 강제로 짜인 스케줄 속에서 살던 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는 좋을 대로 시간을 낭비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수업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게임 중독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굳이 게임을 자제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어느 순간부터 나는 4학년이 되어 바빠진 N이 게임에 접속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기 시작했다.
[ 미도. 시험공부는 하는 거지? ]
심장을 바늘로 찔린 것 같았다. 내일부터 나의 첫 중간고사가 시작된다. 손 놓고 마냥 놀고만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생활은 엉망이었다. 과제는 꾸역꾸역 하기는 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없었지만 그마저도 대강 해치우는 수준으로 처리했기에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는 없을 터였다. 지금도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시험공부는 새벽 내내 벼락치기를 할 작정으로 새로 업데이트된 던전을 돌고 있었다.
[ 응. 걱정하지 마~ 잠깐 스트레스 푸는 거야. ]
잠깐 출석 체크 이벤트를 위해 접속한 N에게 거짓말을 했다.
[ 듣자 하니 오늘 하루 종일 접속해 있었던 것 같은데? ]
아, 누가 일러바친 거야? 다들 바쁜 시기라 종일 나 혼자 있었는데. 누가 오프라인 모드로 들어와 있었나?
[ 켜 놓기만 하고 공부하고 있었어! 정말이야. ]
[ 요새 완전 게임 중독이야. 우리 성실한 미도 어디갔어! ]
의표를 찌르는 N의 메시지에 나는 반성은커녕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외로워, 외로워 죽겠단 말이야. N의 학교에 합격했더라면 지금처럼 과에서 외톨이 생활을 해도 괜찮을 텐데. 같은 캠퍼스 어딘가에 N이 있을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텐데. 주말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서로의 자취방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도 있을 거고, 문득 야작하느라 힘들지? 하고 천연덕스럽게 N의 작업실을 찾아갈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 나는 N과 KTX로 약 1시간 30분은 걸리는 거리의 지역에 떨어져 있고, KTX의 승차권은 내 용돈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으며, 애당초 N은 졸업 작품을 준비하느라 매우 바빴기에 농담으로라도 만나자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 흑흑, 사실 오늘 밤새도록 공부할 거야. 언니가 잔소리 하니까 이제 꺼야지! ]
머릿속에서 맴도는 모난 말이 우다다 텍스트로 튀어나올 것 같아 답장이 오기도 전에 잽싸게 로그아웃 버튼을 눌러버렸다. 요란한 게임의 배경음악이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온 방에 들려오는 건 나의 한숨뿐이다.
키보드 옆에 놓인 두꺼운 전공 서적을 집어 들고 당장 9시간 후에 첫 전공 시험이 시행될 예정이라는 현실을 마주한다.
고등학생 때는 어떻게 책상에 종일 앉아있었던 거지. 아, 물론 다른 의미로.
뇌에서 정보 처리를 거부하는 단어를 억지로 눈에 넣으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오늘도 어김없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술 냄새 가득한 소리가 창틀을 비집고 들어온다. 하하, 나보다 더한 놈도 있는데 뭐 어때. 속으로 조소하며 제대로 읽지도 않은 페이지를 넘겼다.
혼자 있는 밤은 이제 익숙하다. 휑하던 벽에는 서툰 솜씨로 예뻐 보이는 엽서를 사서 덕지덕지 붙여놓았고, 시험이 끝나면 본가에 들러 N의 그림을 가져올 예정이다.
나중에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하면, 예쁘게 집 꾸미고 살아야지.
시선은 책에 고정되어 있지만, 그 순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럴싸한 어른이 되어 취향대로 꾸민 집에서 여유롭게 게임이나 하는 내 모습이다.
N을 초대해서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햇살이 잘 드는 거실에서 N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조용히 그걸 지켜보는 거야. 그러려면 소파보다는 커다란 테이블을 두는 게 좋겠다. 그림 그리는 걸 마냥 지켜보는 건 좀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 되겠군. 맛있는 커피랑 간식도 준비해야지. 노래도 잔잔하게 틀면 좋겠다. 마치 카페처럼.
그렇게 몽상에 잠긴 채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전공책의 페이지도 팔락팔락 넘어간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4시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