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기록 no.13 - 불안과 전화

by 푸르다

음울한 기억이 가득한 고향집 담벼락에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어느 날 바닥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담쟁이덩굴의 줄기를 발견한 것은 지안이었다. 금이 간 담벼락에는 갈라진 틈을 따라 흉측하게 시멘트가 덧발라져 있었고, 늘 그것이 보기 싫었던 지안은 땅에서 솟아올라 담을 타고 길게 뻗은 넌출을 할머니가 당장에 뽑아버리려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차라리 담쟁이 잎으로 뒤덮인 벽이 훨씬 더 보기 예쁠 거라고 설득하면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고속도로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고, 그 때문에 커다란 덤프트럭이 하루에 몇 번씩 지안의 고향집 앞 과속방지턱을 덜커덩거리며 지나다녔다. 섬세함과 거리가 먼 트럭 운전사들은 브레이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굉음을 내며 과속방지턱을 넘었고, 그때마다 집안에서는 진동이 느껴졌다. 하루하루 충격이 쌓이다 보니 시멘트를 발라둔 담벼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분통을 터트리시던 할머니는 젊은 마을 이장을 불러 금이 간 벽의 보수공사를 부탁하셨다. 말이 공사였지, 서투른 솜씨로 시멘트를 덧바르는 일은 어린 지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담벼락에는 흉터가 생겼다. 시멘트가 다 마른 어느 햇볕 좋은 날, 지안은 벽에 기대어 서서 담에게 말을 건넸다.


니도 흉 졌네.


턱 밑에 있는 흉을 손가락으로 슬슬 문지르면서 지안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트럭을 바라보았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


처음으로 미도와 함께 셋이서 식사를 한 날, 지안은 끝끝내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원래 살갑게 말을 붙이는 성격이 아녔다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궁리하는데 시간이 다 흘러갔다.


"그냥, 궁금하다. 사람 자체가."


아쉽게도 미도의 어깨는 쌀쌀한 가을바람을 막기 위한 청재킷에 가려져 있었고, 사진으로 보았던 담쟁이덩굴 문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안은 미도가 마음에 들었다. 알아서 내 몫까지 주문해줘. 그리 말하며 정아가 배탈로 인해 자리를 비운 사이, 난감해하던 지안을 대신해 미도는 메뉴판을 구획 별로 짚으며 어떤 음식을 주문할 지 골라주었다. 고개만 끄덕거리는 지안이 답답했을 텐데도 미도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재촉도 하지 않았다. 혹시 못 먹는 음식이 아닌지만 확인하고 주문을 해도 될지 동의를 구할 뿐.


"그러면 종종 같이 밥 먹자고 한다?"


앞머리에 가려진 지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애쓰던 미도의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 다음 약속을 기약하며 정아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지안은 오래도록 이론으로만 제 머릿속에 존재했던 단어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 연심. 연정. 흠모. 연모. 그따위 단어들.


새벽 2시경, 잠이 오지 않아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입에 물고 어둠에 잠긴 달동네를 내려다본다. 드문드문 어두운 골목과 사거리를 밝히고 있는 가로등, 전압이 불안정한지 계속해서 점멸 중인 가로등, 수명이 다 되었는지 있으나 마나 한 희미한 빛을 비추는 가로등. 그리고 저 멀리 달동네와 대비되는 번듯한 건물의 숲이 보인다. 이 시각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사무실들이 옹기종기 모여 달처럼 빛나고 있다.

지안에게는 이 풍경이 밤하늘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공해로 실제 별빛 따위는 거의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하늘. 별인가? 하고 하늘을 가리키며 정아에게 물었더니 와락 웃음을 터트리며 그건 인공위성이라고 했다.


시골에서 보던 밤하늘은 더 이상 볼 수 없어.


어두운 밤 특유의 고독하고 시린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야트막하게 벌어진 입술 틈새로 담배 연기가 차가운 밤공기에 뒤섞여 날아간다. 불현듯 이 풍경을 미도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손가락에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의 열기가 느껴진다.

지안은 구석에 놓아둔 빈 박카스 병에 담배꽁초를 집어넣었다. 꽁초는 아직 반만 차 있다.






집 청소를 마치니 서녘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 잠을 잘 시간을 놓쳐버려 부자연스럽게 맑아진 머리가 몸을 움직이게 했다.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류해서 아파트 쓰레기장에 내놓았고, 부패하기 시작한 음식물도 모두 모아서 가져다 버렸다. 버석버석한 바닥에는 오랜만에 물걸레질도 했다. 창틀에 잔뜩 쌓인 더러운 먼짓덩어리들도 버리려고 모아둔 양말로 꼼꼼하게 닦아내고, 귀찮다는 이유로 방치해둔 책장의 틀과 손이 쉽사리 닿지 않는 냉장고 아래 등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도 마른걸레로 모두 닦아냈다. 화장실에서도 오랜만에 향긋한 냄새가 난다.


"여보세요?"


'054'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화면에 뜨자마자 미도는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도대체 어떤 경로로 도용되었는지, 보통 지방에서 걸려 온 전화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이름도 모르는 국회의원의 전화였기에 여태까지는 늘 재빠르게 종료 버튼을 누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도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지안의 전화라는 것을 알았다. 아직 대답 한마디 없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미세한 숨소리는 분명 지안의 것이다.


"지안아."


구획을 나누어 청소를 하던 미도는 이제 마지막 청소 구역을 남겨놓고 있다.


"나 지금 청소하는 중이야."


베란다 구석에서 발견한 5호 우체국 택배상자는 테이프가 모두 깔끔하게 제거된 채 정갈하게 접혀있었다. 불현듯 작업실 안쪽의 좁다란 서재에 놓인 빈백이 지안이 구매한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미도가 가져다 둔 알파카 모양의 바디필로우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생생하다.


이건 잘 때 껴안는 거잔나. 편히 누워있을 수도 없고. 이기 머고.


그렇게 볼멘소리로 꿍얼거리더니 냉큼 쿠팡으로 주문하고는 '빈백 사도 되나?'하고 물어보았었다. 고로 이 상자는 저 빨간색 빈백이 담겨있던 상자였다. 작업실 책상 아래에 주저앉아 미도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손바닥은 그저 뜨뜻미지근 할 뿐이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또다시 후회가 몰려온다. 사실 어린아이가 사탕을 굴리는 것처럼 미도의 입안에서는 한 단어가 이 침묵 내내 계속 혀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겁쟁이야. 자책해도 이미 전화는 끊겼고, 스마트폰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수신자 목록이 떠 있는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어릴 적 집에 있었던 유선 전화기를 떠올린다. 그때는 전화가 끊겼음을 확실히 알려주는 신호음이 있었다. 철커덕, 뚜-뚜-뚜- 긴 신호음이 일정한 박자로 귀를 때리며 더는 대화할 사람이 없음을 알리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미도는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 너무 걱정하지는 마· · · ]


멍하니 내려다보던 스마트폰 화면의 상단에 정아의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팝업이 뜬다.


청소 마저 해야지. 에세이도 써야 하는데.


우체국 택배 상자에는 N에게서 받은 선물들이 이미 들어가 있다. 오랫동안 아껴왔던 색연필로 그려진 N의 그림들, 길드원들이 모두 그려져 있는 A4 크기의 포스터, 몇 년에 걸쳐 그린 게임 팬아트를 모아 만든 엽서 세트, N과 미도의 게임 캐릭터로 만들어진 키링 등. 잿빛으로 바래진 추억이라고도 부르지 못할 기억을 미도는 상자에 모두 집어넣었다.

책상의 왼쪽 벽에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그림, 포스터, 전시회 티켓, 영화 티켓․․․ 벽을 장식하고 있던 것들도 모두 제거했다. 블루텍을 이용해 붙였기 때문에 살짝 힘을 주어도 쉽게 떨어졌다. 벽에 들러붙어 채 떨어지지 않은 블루텍 조각들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모으니 손톱 크기만 한 덩어리가 생겼다. 그렇게 깔끔해진 벽은 단 한 번도 제 위를 무언가가 덮은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맨들맨들하다.

빠나님이랑 자주 만나냐는 질문에 N은 살짝 인상을 구겼었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는 아닌 척 했지만, 미도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괜히 물었어. 어쩌면 좋지. 실수했다는 생각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고, 차마 눈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어 N이 만들어 준 파스타를 입에 열심히 쑤셔 넣었다.

이따금 캠퍼스에서 마주치기는 하는데 사적으로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고 N은 파스타를 한 입 삼키고 나서야 덤덤하게 답해주었다. 어쭙잖은 질투 따위를 하기 전에 공부나 더 열심히 했었어야지. 자신을 자책하며 미도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화제를 궁리하다 결국 자신의 입시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지방에 있는 대학교로 갈 확률이 높다고. 사실은 N이 다니는 학교에 원서를 넣고 싶었는데 성적이 모자랐다고.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좋은 학교니까 오고 싶었다고, 중학생 때부터 목표였었다고 얼기설기 변명을 늘어놓으며.


"책은 어디에 뒀더라."


블로그를 보며 끄적인 포스트잇, N에게 선물 받았던 노트를 마지막으로 상자에 넣고 나니 그놈의 청록색 책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뒀는지 통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오늘 온 집 안을 청소했으니 한 번쯤 봤을 법도 한데.

미도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어디에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보니 지안이 떠나간 날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던 게 떠오른다.


"내가 그걸 아무 생각 없이 버렸을 리가 없는데..."


작업실을 나오자 이제 어둑해진 거실 바닥에 가구의 짙어진 그림자가 길고 음울하게 깔려있다. 거실 등을 켜자 깨끗이 정돈된 거실이 드러난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도는 책을 찾아 분주히 시선을 옮겼다. 집 안에서 물건을 잃어버리기는 처음이었다.

으르릉, 하고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온다. 베란다로 나가 밖을 바라보니 곧 비가 올 모양인지 안 그래도 태양이 저물어 어두운 하늘이 한층 더 어둑하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샷시를 꼭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아무래도 저 상자는 내일 가져다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직 책도 찾지 못했으니.

거실을 이 잡듯 뒤져도 책을 발견하지 못하자, 미도는 우선 에세이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주제는 '청소'로 해볼까. 눈 밑은 푹 꺼져있고,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지만, 마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치며 미도는 작업실로 돌아왔다.

한글 파일을 켜두고 키보드를 두드려보다 마우스를 딸각거린다.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고 백스페이스를 다다다 연타한다. 한숨을 푹 내쉬고 엄지와 검지로 콧등을 꾹 누른다. 눈을 끔뻑끔뻑하기도 한다. 키보드 위에 다시 손을 올리고 손톱으로 자판을 가볍게 두드린다. 화면에는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 떠 있다. 다시 한숨.

그리고 미도는 마우스를 딸각거렸다. 습관처럼 인터넷 창을 켜고, 주소창에 손가락이 기억하는 대로 주소를 입력한다.


※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 입니다. ※


N의 블로그가 사라졌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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