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기록 no.12 - 불안과 유서

by 푸르다


삶에 권태를 느낀다.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말들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다. 그래서 지안은 상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구색만 갖춘 각종 전, 간이 하나도 맞지 않는 나물, 하얗게 익은 조기, 제대로 끓기는 한 건지 의심되는 탕국. 이 모든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 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따박따박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할머니의 기일. 그 누구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가족 모임은 그녀가 처한 처지를 더 또렷이 보게 만들어 지안을 더욱 괴롭게 했다.

서로 상처 주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즐거울 리가 없다. 딴에는 친한 척하려 배려도 없이 내뱉는 저 말들은 하나하나 비수가 되어 가슴에 날아들고, 가족이라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살의를 억누르며, 지안은 속으로만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을 뿐, 그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자리에서 지안은 담배가 간절해졌다.

동시에 가족을 넘어선 모든 인간관계에 환멸이 나기 시작한다. 결국 모두 죽어 없어질 텐데 왜 끊임없이 헛된 희망을 가지게 되는 걸까. 사람은 왜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가. 사회적 관계에 집착을 하며 살아가는가. 자신 또한 타인과 다름없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안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다.

간신히 두어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낸 후, 지안은 드디어 텅 빈 집에 홀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깨끗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구입한 지 오래되었지만, 종이는 처음 샀을 때와 같이 새하얀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아끼던 볼펜을 집어 들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지안은 늘 유서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기고 싶은 말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 또는 누군가에게 사랑했다느니 하는 말 같은 것을 남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낯간지러운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거니와 자기 죽음이 그렇게 감상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남긴다면 죽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지안은 제 삶의 끝은 자살로 마무리하리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지안은 늘 삶에 지쳐있었다. 그녀의 삶은 공허했다. 세상에 단 한 명, 할머니는 지안의 안에 결여된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할머니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지안에게 그 ‘무언가’에 대해 악담을 퍼부었고, 마침내 지안이 그 ‘무언가’가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것이 결국 지안에게 독이 될 줄 모르는 채로.

고민 끝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것을 시작으로,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 자기 죽음에 슬퍼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자신에 관한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처음부터 지안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주기를 바랐다.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지안은 아마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지안이 살아있어 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안의 막연한 바람이고, 실제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안은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에 지쳐있었다.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도달했을 뿐, 결코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짧고 건조한 유서를 완성한 후, 지안은 그것을 네 번 접어 아끼던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 책을 재활용품 상자에 던져 넣었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싫어하던 지안이 미도에게 흥미를 보였을 때 정아는 천지가 개벽한 줄 알았다. 복수심으로 꾸역꾸역 세상을 살아내고 있던 지안은 사람을 소개받을 때마다 연애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번번이 정아에게 퇴짜를 놓았다.


"나 레즈비언이다."


정아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식사자리에 나온 지안이 마지못해 고백하듯 입을 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스무살이 된 지안은 고향을 등지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같은 시기에 본가로 돌아온 정아는 지안에게 일찌감치 물려받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같이 살 것을 제안했지만, 지안은 이를 거절하고 영화에서 나올 법한 달동네에 터를 잡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실제로 영화 촬영지로 종종 섭외되는 곳이었다.

동틀 무렵, 옥상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새벽빛에 물든 달동네의 풍경을 내려다보면 이대로 세상이 멈추어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게 좋다고 지안은 말했다.

지안이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없이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을 잘 알기에 정아는 일부러 규모가 크고 서로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가벼운 식사모임에 종종 지안을 초대하고는 했고, 그때마다 지안은 군말 없이 나와서 조용히 밥을 먹고 돌아갔다. 호기심에 말을 거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지안은 단답형으로 일관했고 역시나 깊은 관계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부담스러우면 안 와도 돼. 항상 모임 안내 문자 마지막 줄에 그 말을 덧붙이면 지안은 '공짜 밥 최고.'라고 답을 보내오곤 했다.


"정말?"


지안과 6년을 알고 지냈지만, 지안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사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기는 했다. 흥미를 보이는 연예인이 죄다 여자였으니까.


"그럼... 앞으로는 지안이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여자를 찾아서...!"


사실 정아도 오늘 식사자리가 크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지안을 눈여겨본 친한 대학 선배가 하도 간곡히 소개해달라고 부탁하기에 자신의 남자친구를 포함한 네 명이 어색한 모임을 갖게 되었을 뿐.


"그나저나 니는 저 남자랑 와 사귀나. 마음도 없으면서."


레스토랑의 화장실에는 지안과 정아, 둘밖에 없었지만, 지안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파우치에서 립스틱을 꺼내 톡톡 입술 위에 얹는데 쓸데없이 밝고 화사한 조명에 눈이 부시다. 눈을 찡그리며 정아는 거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립스틱이 고르게 발렸는지 확인했다.


"애인 없으면 하자 있는 여자 취급받는다고 자꾸 잔소리를 하잖아."


위장용 남친인 거지. 정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푸념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가벼운 투정 내지 한탄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이 말속에는 엄청난 분노가 담겨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철저히 숨길 것. 남들이 모르게 할 것. 그것이 정아가 어릴 적부터 엄격한 부모님에게 주입받은 제 1의 신조였다.


"오늘은 좀 솔직하게 말하네."


그런 정아의 마음을 잘 읽어주는 것은 지안밖에 없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여자를 소개해줄게."

"내는 연애 할 생각이 없다켓잔나."


진짜 고마해라.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정아는 입술을 쭉 내밀며 불만을 표시한다. 우리 지안이 참 예쁜데. 사랑받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지안은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지만, 개성이 확연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 오래 볼 수록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울에 상경한 이후 통통했던 지안의 볼살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얄쌍한 턱선이 도드라진다. 검은 머리카락이 5cm 정도 자란 것을 보니 곧 뿌리 탈색하는 것 좀 도와달라고 문자를 보내올 것이다.


"그냥 친구 사귄다고 생각해. 마음에 들면 연애하고."


지안을 향한 정아의 감정은 결코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다. 따지자면 자매애에 가깝다. 결은 다르지만 깊은 어둠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다는 점에서 동지애도 포함되어 있다. 둘은 부모라는 적을 둔 전우이자 친구이자 자매였다.


"맘대로 해라."


꾸며낸 웃음을 입가에 장착하고 식사자리로 돌아가자 와인을 마시며 웃고 있던 두 남자 사이에 일순간 정적이 허공을 갈랐다. 아주 찰나의 침묵이었지만 정아는 그 둘이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아 자신의 몫으로 주문된 레드 와인을 들어 향을 맡는다. 입술만 살짝 적시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웨이터를 부르고 다른 와인을 주문한다. 자신과 지안이 마시기에는 너무 독하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도수가 낮고 달콤한 화이트 와인을 두 잔 가져다 달라고 말한다.

"역시 여자들은 단 걸 좋아하네."


임시로 남자친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남자의 말에 수줍은 미소를 띄워주며 정아는 속으로 험한 말을 읊었다. 반년은 사귀었으니 슬슬 정리해도 되겠지. 갓 서빙된 화이트 와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흥미를 보이는 지안에게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한다.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야겠어요."


저희도 여자들끼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끼어들지 마세요. 꺄르르 웃으며 정아가 농담처럼 말을 흘리자, 지안을 소개해달라고 조른 선배가 관대한 척 어쩔 수 없지, 하고 답을 한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지안이 단답형으로 일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다행히도 흥미가 뚝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정말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하며 정아는 와인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갓난쟁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지안은 목놓아 울지 못했다. 마음껏 할머니를 사랑하지도 원망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울음을 삼켰다 토해냈다, 그렇게 바닥을 기며 괴로워했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고 겨울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차가운 바람의 냄새가 진동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장례식장에 나타난 지안의 친척들이 가증스러웠지만 정아는 티 내지 않았다. 넋을 놓고 상주석에 앉아있는 지안을 대신해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나르고 상조회사 직원과 필요한 장례 절차를 처리했다.


"친척들이 계속 연락해?"


남자들을 돌려보내고 단둘이 레스토랑 근처의 바에 들렀다. 파리처럼 거슬리던 것들이 사라지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의 한쪽 구석에 나란히 앉아 정아는 습관처럼 인테리어를 찬찬히 살펴본다. 바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음악처럼 개성 있게 꾸며진 곳은 아니었지만, 어둑한 노란빛 조명이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다. 바텐더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정성스럽게 유리잔을 닦고 있다. 주문을 하기 전까지는 손님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는 척하고 있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


"응. 그놈의 땅 때문에."

"값이 그렇게 올라갈 줄 누가 알았겠어."


지안이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라고는 약 1000평의 가치 없는 땅과 2천만원이 들어있는 통장뿐이었다. 대략 1천만원은 장례비용을 처리하는 데 쓰였고 거머리 같은 친척들이 내놓은 부조금은 100만원도 되지 않았다. 모든 비용을 정산한 후 옆에서 분통을 터트리며 엉엉 우는 정아를 오히려 지안이 달래주었다.


"팔 생각 없어."


장례가 끝나고 해가 바뀌자마자 지안은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도망쳤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고향집은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나 다름없었기에 신경 쓸 것이 전혀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기로 한 날, 단출하게 꾸린 짐을 담벼락 아래에 기대어 두고 지안은 이제 할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아 황폐해진 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때 수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방치된 밭은 단단히 땅이 얼었음에도 잡초가 무성했다. 한술 더 떠 산짐승들이 밭을 파헤친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만, 지안은 전혀 괘념치 않았다.


"그 땅 팔아서 돈으로 갖고 있으면 더 지랄하겠지. 엉기난다."


혁신도시가 들어선다는 소식 하나에 누구도 탐내지 않던 그 땅의 가치가 180도 뒤집혔다. 고향에는 일절 신경을 끈 채 서울에서 밥벌이를 위해 바둥대고 있던 지안에게 할머니 제사를 어디에서 지낼 거냐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여름부터.


"그건 누고?"


카카오톡이 도착하자 까맣던 정아의 스마트폰 화면에 팝업창이 떠오른다.


"소묘 수업에서 만난 친구."


웬일로 관심을 보이네? 정아는 잠금을 해제하고 지안에게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딱히 켕기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니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안이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내 소개 좀 해도."


프로필 사진을 확대해 찬찬히 들여다보던 지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말에 정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소개해 달라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지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지안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배달된 위스키를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와? 친구 좀 사귀라메."


프로필 사진에서는 미도의 생김새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없다. 명확히 보이는 것은 어깨를 따라 늘어진 담쟁이덩굴 타투 뿐. 누가 봐도 '이것 봐. 나 타투했어.'하고 자랑하는 사진이다.


"이름 특이하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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