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관계 속에서 가치관을 통해 나를 증명하는 것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또한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나에 대한 고찰이나 성찰일까? 명상을 통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일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존재에 대한 해답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해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와 ‘나다운 것’은 다르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존재 그 자체이지 ‘나답게 해주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나’라는 존재 자체는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있어도 세계가 멸망해 나 홀로 남아도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지 않는다. 물론 죽게 되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질지언정. 그러나 ‘나답게 해주는 것’은 일종에 관계 안에서 ‘나’를 증명해주는 것과도 같다. ‘나’ 혼자 있을 때 ‘나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사람들 속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답게 해주는 것’이 증명되고 드러난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의 위치, 혹은 나의 정체성, 가치관, 신념 등으로 인해 ‘나답게 해주는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죽어서 사라져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남기 마련이다. 가령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노회찬 전 국회의원이 지금 이 세상에는 없지만 ‘김대중 정신’, ‘노무현 정신’, ‘노회찬 정신’과 같이 그들의 가치관을 동경하고 함께 이루려는 사람들 속에 계속 남아있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 ‘노회찬’이라는 정치인이 사람들이나 사회라는 관계 안에서 자신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하고, 증명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관계 안에서 가치관이나 신념을 통해 나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실제 종교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이 ‘신앙’이었다. 물론 책, 삶에 대한 태도, 자존감, 엄마 등의 말들이 나왔지만 이 역시 종교라는 관계 외에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에 기인한 것이었다. 직장생활에 찌들어 사는 후배에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그냥 즐겁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 후배는 자영업을 하면서 낮과 밤이 뒤 바뀐 상황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또 다른 후배는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완전한 독립’이었다. 이 후배는 현재의 가족과의 관계 안에서 경제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었다. 혼자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후배에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엄마였다. 가족이라는 사회라는 관계 안에서 두 아이에 대한 책임과 육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가족 안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던 한 선배는 ‘자존감’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아직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관계
그럼 아직 가치관에 제대로 형성됐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아이들에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는 오로지 ‘관계’ 일 것이다. 만 4세의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본인은 쌍둥이 아이들에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고도 쓸데없는(?) 질문을 해보았다. 역시나 쌍둥이들은 ‘답게가 뭐야?’라고 질문이 되돌아왔다. 한참을 ‘답다’와 ‘다운 것’을 설명하고 난 뒤의 아이들이 답한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엄마를 사랑하는 거야’와 ‘아빠를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쌍둥이라 같아’ 각자 상대방인 ‘서로’를 지목하였다.
결국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관계 속에서 나를 증명하는 것이고, 그 증명은 가치관이나 신념을 통해 말과 글, 행동으로 나타나면서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