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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Jul 15. 2020

박원순 조문, 나는 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늦었지만 누군지도 모를 A씨의 옆에 서며

모두가 그랬겠지만 나역시 복잡하고 힘든 몇 일을 보냈다.

가슴속의 분노와 응어리는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처음 박원순 시장의 실종기사를 접했을 때는 그저 걱정이었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는 기사를 봤을 때는 '설마?'였다.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기사를 접했을 때는 혼란과 피해자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 공개된 유서 내용을 보고 느낀 감정은 '배신'과 '분노' 그리고 뒤 늦게 휘몰아쳐온 '안타까움'과 '슬픔'이었다. 단 하루만에 내 가슴속을 후벼파는 감정변화는 정말 너무도 힘들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지는 사회모습과 현상에서 나는 짖눌림과 답답함으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의 꼬리가 말로 글로 내뱉기를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고,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는 속을 쓰리게 했다.
  
박원순 시장의 역사가 사람들에게는 '차마 그가 그런 몹쓸 짓을 했을 리가 있어?', '여자가 문제가 있겠지', '박원순 시장이 함정에 빠져서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걸 꺼야', '무죄추정의 원칙이지 아직 사실이라 단정하기 어려워', '당당하면 얼굴 보이고 말해라'라는 생각이 들게 했고, 그 생각을 말로 글로 어느새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벌어지는 2차 가해의 형벌은 성추행의 고통보다 더 악랄하게 피해자를 옥죄고 있다. 진실 보다는, 피해자의 목소리 보다는, 박원순 시장의 죽음과 조문에만 몰입하는 사회의 모습.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한낱 '예의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모습은 침묵의 강요였다.
  
침묵의 강요는 박원순 시장이 살아온 길과 그의 죽임이 오버랩 되면서, 사람들은 특히 가부장적 남성들과 권력자들은 피해자 보다는 박원순의 죽음에 더 안타까워 하는 사회 모습 때문이었다.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목소리는 외면받고 가해자가 당당하다. 오랜 세월이 지났고, 미투운동 등을 거치면서 '세상은 변했고, 사회는 조금 나아졌구나'라는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이 말의 함의는 성추행 당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그리고 그와 함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목소리를 막아버린다. 이런 사회가 올바른 사회일까?
  
박원순 시장은 죽지 말고 살아서 진실에 직면하고 책임을 졌어야 했다.
  
박원순 시장은 과거 각종 인권 사건과 성폭력 사건을 맡으면서 늘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자 노력했고, 실천했다. 그래서 많은 약자와 피해자들이 함께 이겨내고 싸울수 있었다. 그랬던 그가. 누구보다도 피해자의 심정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을 그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에 난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났다. 그 동안의 활동으로 누구보다도 피해자의 심정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을 박원순 시장이었기에. 이렇게 무책임하게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진실에 직면하고, 진실을 밝혔어야 했으며, 잘못이 있다면 응당 그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졌어야 했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의 죽음으로 진실은 묻혔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묻혔다.
  
더욱이 그의 유서에서 피해자에 대한 언급과 사과 한 마디 없다는 것은 그 동안의 그의 행적과는 대척점에 있는 모습이었다. 박원순 시장은 '성폭력이 왜 일어나는지', '고발을 하기까지 어떤 심정인지', '가해자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해자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을 택했다. 그의 죽음으로 '사과 받고 싶었다'는 피해자의 바램은 이제 사라졌다. 생전에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박원순 시장의 말과 행동들은 유서와 죽음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고인이 꿈꿔웠던 가치관과는 다르게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이유로 2차 가해가 벌어지고 있다.
  
서울시와 민주당은 '서울특별시 장'을 치루는 것이 아닌 조용한 가족장례를 치루게 했어야 하며, 오히려 의혹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보였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단체들은 박원순 시장의 '서울특별시 장'과 시민조문소 설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반대하는 청원이 하루만에 20만명이 넘었다. 정의당의 류호정 의원과 장혜영 의원은 조문을 하지 않고 피해자 편에 서겠다고 발언해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은 고인을 추모할 때'라며, '죽은 사람 앞에서 예의가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지금은 고인을 추모할 때가 아니라 진실을 밝힐 때'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죽은 사람 앞에서 예의 없다'는 것은 덮고 가자는 말이다. '추모할 때'와 '예의'라는 말로서 묻고 있던 진실이 장례가 끝나면 밝혀질까? '추모 할 때'와 '예의'는 결국 '이미 다 끝난 이야기 인데 덮고 가자'. '다시 끄집어 내서 무엇하냐'로 바뀔 가능성이 많다. 이미 인터넷 상에는 '그만합시다 가신분께', '그만해 모두' 등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고인의 죽음 앞에 애도와 추모를 하는 것은 예의이며, 사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을 요구하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공적인 일이며 예의의 문제와는 별개이다. 더욱이 위력 앞에 발생한 성추행 피해자 입장에서 '서울특별시 장'과 시민분향소의 추모와 조문은 세상에 '혼자'였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미 박원순 시장의 죽음으로 '나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을 피해자에게 5일에 걸친 '서울특별시 장'과 시민분향소의 조문과 추모행렬을 바라봤을 때 그 심정은 어땠을까? '이 세상에서 나의 목소리를 나의 어려움과 심정을 알아줄 사람은 없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수많은 유력한 정치인들의 조문속에서 류호정 의원과 장혜영 의원과 같은 정치인의 '조문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피해자에게 작은 위안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조문을 하고 피해자 편에 서면 되는거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미 나에게 위협을 가하고 고통을 준 사람에게 마음이 가 있는 것을 목도한 피해자가 이제 와서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고 그것을 온전히 알아줄까? 설령 진실이었다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서울시는 '서울특별시 장'과 시민분향소가 아닌 가족들만의 장례를 치룰 수 있게 해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관련된 의혹을 밝히겠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누명이라면 박원순 시장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만일 가족간의 장례로 축소되어 치렀다면 지금의 혼란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당 역시 자당의 단체장이 연루된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하고, 의혹 해소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어야 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정의당은 조문을 하지 말고 피해자 옆에 섰어야 하며, 심상정은 사과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조문과 피해자를 향한 태도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변한다는 정의당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류호정, 장혜영 두 정치인을 제외하고도 정의당의 대표 정치인들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행동을 취하기 보다는 고인이 된 박원순 시장에 대한 추모와 조문만이 앞섰다. SNS 등에 올라온 글들은 대부분이 추모였고,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물론 장례가 끝난 지금 피해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나는 피해자가 이걸 온전히 받아들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어려울 때 곁에 있어야 그 진심을 알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당은 그러지 못했다. 더욱이 심상정 대표의 '조문논란'에 대한 사과는 정의당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정의당은 그 동안 모호한 입장을 취해 왔다. 과거의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 '조문 논란'과 심상정 대표의 '사과'처럼 당내에서 논란을 더욱 키워왔고, 당 외적으로는 시민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도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의당은 민주당이나 통합당처럼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대중정당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고 자부하는 정당이다. 지난 대선 때 성소수자 문제에 있어 다른 정당 후보와는 확연히 다르게 성소수에 대한 차별반대의 입장을 명확히 한 심상정 대표의 방송토론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정의당의 모습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차라리 정의당은 박원순 시장의 조문을 안하겠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당 차원에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진실과 의혹을 밝히는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어야 했다.
  
현재 정의당에서는 '탈당 러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 '탈당 러시'는 정의당의 모호한 입장에서 발생한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도 지지받고 싶고, 저기서도 지지받고 싶어서 하는 행동들은 결국 어느곳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조문을 하지 않고, 피해자의 입장에 섰었더라면 '탈당'만큼이나 '입당'이 진행되지 않았을까? 강요된 침묵에 묻혀있던 목소리들이 정의당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당은 여전히 모호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것이 정의당에게 부메랑으로 날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문을 하지 않았다.
  
박원순 시장의 과거 행적은 '가해자가 당당하고,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잘못된 사회를 바꾸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부끄러움을 알고 피해자가 당당한' 사회를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박원순 시장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피해자는 더욱더 숨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피해자가 더욱더 숨어야 하는' 사회로 가서는 안된다. 그것은 고인이 꿈꿔왔던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피해자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행동들이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피해자를 먼저 생각하고, 성폭력을 성폭력이라고 이야기하고, 가해자가 오히려 수치심을 느끼는 사회를 만드는게 박원순 시장이 생전에 만들어 왔던 가치가 아닐까? 진정 박원순 시장을 애도한다면,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꿈꿔온 사회에 보다 한 걸음 다가서려면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말라'라는 말과 조문으로 2차 가해를 하기보다는 피해자와 연대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맞는게 아닐까?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2000년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한일여성법정에 남측 검사로 참여했던 박원순 변호사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그래서 나는 조문을 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애도하며 누군지도 모를 피해자 A씨 옆에 서겠다 생각했다. 비겁하게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피해자 편에 서겠다고 밝힌다.


※ 이 글은 개인블로그에도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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