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내로 출산을 앞둔 산모로서 이번 해외 직구 금지, KC인증 관련 논란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해당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2024년 5월 16일에 정부는 국무총리 주재로 '해외직구 급증에 따른 소비자 안전강화 및 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는데,
세부 내용 중 어린이 제품 34개에 대해 KC인증이 없는 경우 직구를 금지하다는 언급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반발이 일자, 5월 17일, 19일자로 보도 설명자료를 내서 위해성이 확인된 제품만 반입을 차단하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첫 발표 당시, 가장 화가 났던 문구는 '+ ∝ (모든 어린이 제품)' 이라는 말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막는 건가-하고 기가 찼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일련의 과정에서 정부가 놓친 건
1) 이해 관계자에 대한 면밀한 고려 2) 명분과 실리 3) 정책에 대한 신뢰성 이 세 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해 관계자에 대한 면밀한 고려
방향을 기준으로 정책을 분류하자면 장려성 혹은 규제성이라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세부 실행 방안에 지원금, 감면, 우대가 포함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 배타성에 유불리가 갈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예민해지게 된다.
흔한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얘는 되고, 나는 왜 안되는데!' 라고 할까나.
더구나 금번 직구차단 대상 품목들은 네거티브의 탈을 쓴 광역성 포지티브 방식이었다.
안되는 항목들이 너무 많았으며, 후단에 '모든 어린이 제품' 이라고 모호하게 기재했지 않은가.
사실상 모든 육아용품 직구를 금지한다는 말과 진배없이 다가왔다.
네거티브(Negative): 금지된 사항만 열거하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항을 허용하는 규제 방식
포지티브(Positive): 허용되는 사항만 열거하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항을 금지하는 규제 방식
우리나라 용품샵에서 모든 임신, 출산, 육아, 아동용 상품을 취급하지 않으며,
유모차(유아차), 카시트, 하이체어 같은 고가의 제품 판매상은 온, 오프라인 할 것 없이 포진해 있다.
중고시장에서조차 정품 대비 가격이 차이나지 않는 인기 품목들이 존재하며,
일부는 해외, 국내 판매가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경우들이 있다.
자연스럽게, 일부 양육자들은 직구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첫 발표에서 정부가 상정한 이해관계자는 대체 누구인가.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며, 자유시장에서의 가격 형성 원리에 대해 논했다.
경제학 기초에서는 수요, 공급의 적정한 선에서 시장 가격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하였다.
정부는 이 중 수요자의 입장을 철저히 간과하지 않았나 싶다.
2024년 6월부터 당장 시행해야만 하는 시급성이 있었는가?
불리해지거나 반발감이 들 당사자와 충분한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는가?
다분히 일방적인 탁상공론이었다.
그러니 비판 받을 밖에.
명분과 실리
무릇, 영향력이 큰 정책은 시행 전에 그 효과를 직, 간접적으로 산출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대규모 공사 내지 개발이 이뤄질 때 타당성 조사(비용 대비 편익)를 실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이번 발표 전 그런 검토가 이뤄졌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실리보단 '안전'이라는 명분을 더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자국 플랫폼에 대한 보호 vs 저렴하게 구입할 소비자 선택권
정보 홍수의 시대, 소비자는 더 이상 봉이 김선달의 강매에 당할 이들이 아니다.
이제 상품의 가격은 수요, 공급, 그리고 유통업자들의 손에 따라 달라지니까.
가격비교 사이트에 조금만 발품을 팔아도 같은 물건 값을 다르게 산정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과연, 최종 소비자의 권익보다 산업의 보호가 더 우선할 수 있는 계량적 근거가 있는가?
어쩌면 정부가 했어야 하는 일은 과도하게 폭리를 취하는 자국 플랫폼에 대한 단속 아닐까.
개인적으로 '한국패치'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왜 외국의 좋은 상품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그리도 비싸지는가.
자국인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급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그러면 굳이 직구를 안 해도 되는데 말이다.
KC 인증은 과연 안전한가?
5월 17일자, 19일자 보도 해명자료에서 정부가 인정했듯, KC인증은 만능이 아니다.
한국의 KC인증제도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절대적인가?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인증은 KC인증 보다 열등한가?
공공, 민간 상관 없이 어느 기관에서 인증하건 KC인증만 받으면 정말로 괜찮고 안전한가?
IT 인플루언서 중 한 명인 잇섭닙 영상, 일부 신문기사 내용을 참고, 발췌하자면 이렇다.
인증 자체에 대한 신뢰가 낮은 상태에서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여기서 재밌는 역사적 사실 하나.
첫 발표에서 KC인증을 받은 물건만 유통되게 한다는 건 현대판 금난전권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이란, 조선시대 초 시전상인에게 독점 판매권을 주고 난전을 금지한 조치다.
이에, 시전상인은 권리를 악용해 물가 상승을 주도했고, 애꿎은 백성들만 피해를 보았다.
다행히 이는 정조대왕 때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폐지됐고,
그 결과 시장경쟁이 활성화 되고 신흥 상인이 성장할 수 있었다.
정부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정책에 대한 신뢰성
첫 발표 이후, 여론의 뭇매를 직격으로 맞았던 것은 결국 관세청 등에 근무하는 실무자였을 것이다.
그들도 아마 급증한 민원에 대부분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까.
'저희도 뉴스 보고 알았어요. 자세한 내용은 잘 모릅니다.'
결정권자가 잘못한 일인데 왜 말단들이 대응하고 있어야 하는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옛 속담이 문득 떠올랐다.
결국, 정부는 한 발 물러서 이번 조치를 일시적으로 철회했다.
5월 19일자 해명자료 말미에 정부는 이런 단서를 붙였다.
'KC인증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며,
앞으로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법률 개정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 나가겠습니다.'
진작에 수렴했어야 했고, 첨부터 신중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전혀 다른 분야건만, 나는 왜 단통법, 도정제가 생각나는 걸까.
이제라도 가이드라인 마련에 나선다는 입장이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소리 같아서 퍽 서운하다.
아기가 곧 태어나면, 이제 사야할 물건들이 한 트럭인데, 당분간 상황을 계속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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