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5개월차 빛같은 뽀로로를 영접하다
미운 0세는 왜 없나!
생후 3개월 쯤부터 시력이 발달하며 낯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피아 식별이 가능하다.
자연스럽게 주양육자인 나의 목소리, 얼굴을 알고 방긋 미소짓기도 한다.
2개월까진 누가 안아주건 울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어쩌다 할머니 내지 할아버지가 안으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울먹인다.
뭐, 태생적인 생존 본능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뒤집기를 시작한 이래 점점 엄마 껌딱지가 되어가는 게 꼭 좋지만은 않다.
암만 내가 주로 돌본다고는 하나, 나도 씻을 시간, 먹을 시간, 잠시 쉴 시간이 필요한데
쉴 새 없이 애정을 갈구하고 자기를 쳐다봐주길 바라니 때론 곤혹스럽다.
특히나 힘든 과제는 '낮잠 재우기'다.
신생아 때는 잠투정을 해도 금방 토닥여주면 잠들고 가만히 있었는데,
힘이 좋아지고 점차 목, 허리, 다리 힘이 붙으면서 발버둥 치며 돌고래 샤우팅을 하니 버겁기 그지 없다.
곱디 곱고, 사랑스러운 내 딸아이이지만, 때로는 얄밉고 밉고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미운 4살, 7살은 들어봤는데 0세는 왜 없나! 0세도 나름대로 힘들다!
미디어 조기 노출을 선택한 결과
달래고, 애원하고, 자장가 노래도 불러주고 토닥여주고, 끌어안고 궁디 팡팡도 해주긴 하나
매 번 그렇게 하긴 대단히 어렵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까지 아프다.
초인같은 체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번 잠과 피곤에 무너지기 일쑤인데
평일 기준으로 독박육아를 매일 12시간 가까이 휴일 없이 한다고 생각해보라!
육아에 퇴근이 어디 있나!
아기가 자야 퇴근이지...
미디어 노출의 악영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혼자 애를 키울 수 있겠는가.
너무나 외롭고 지쳐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하는 심정으로 영유아계 명망이 높다는 그 분을 소환했다.
5개월 아기보다 훨씬 큰, 65인치 TV 화면을 꽉 채우는 파랗고 하얀 얼굴,
뽀로로와 그의 지기들의 컬러풀한 면상과 현란한 몸짓을 발견한 아이의 시선이 나에게서 그에게로 향한다.
아싸! 드디어 밥 먹고 설거지하고 새 빨래 널고 마른 빨래 갤 시간이 생겼구나! 하고 절로 쾌재를 부른다.
미안해 아가, 네가 뽀로로 취향인 줄 모르고 캐치티니핑만 시즌1부터 4까지 정주행 완료해버렸구나.
너무 다음 단계를 마스터해버렸던거야. 네게 이른 줄도 모르고...
빨래를 개며 나도 모르게 염불처럼 마법의 주문을 흥얼거린다.
'바나나 차차~ 바나나 차차~'
후크가 아주 기가 막히게 내 성대를 스치운다.
뽀통령이라는 별칭은 결코 허투루 얻은 것이 아녔거늘
하잘것없는 나따위가 감히 안경 빨이라고 조롱해왔다니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이다.
그의 앞에선 부모고 뭐고 인간의 무력함을 여실하게 느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스토리 전반을 나레이션하는 성우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던 점이다.
소싯적 보았던 전파 뚱땡이, 아니 꼬꼬마 텔레토비 OP를 불렀던 익숙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때리는 순간,
잃어버렸던 동심이 차오르는 느낌까지 들었다.
아아, 뽀로로 기획자여, 당신은 대체 몇 수까지 내다 본 거란 말입니까.
알잘딱깔센 성우 픽에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어차피 미디어는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이에게 노출될 것이다.
내가 안된다고 해도 주변 환경까지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나 역시 스마트폰, PC, 인터넷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몸 아니던가.
내가 못하는데, 아이한텐 어찌 강요하랴.
부모 된 입장으로 도파민 중독되지 않도록 적절한 사용법을 체득하게 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 잠시만, 엄마 밥 먹고 다른 일 좀 할 때 잠깐씩 틀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