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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신부인 Dec 06. 2023

개인의 신념과 집단 사이

개인의 도덕은 사회 집단의 도덕에 의해 형성된다 by. 프랑스 철학자, 니콜라스 콜베르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집요하게 괴롭혀 본 적은 없다.

별 것 아닌 이유로 트집을 잡아 굴림체가 휴먼굴림체가 되도록 후임을 굴려본 적도 없다.

살면서 질투와 시기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적은 있어도 남을 오래 미워할 능력이 없다. 

애초에 남을 괴롭히거나 쓸데없이 험담을 하며 희열을 느끼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앞길 헤쳐나가기 바쁜 이 현대사회에 이 한 몸 건사하는데 힘을 써도 모자를 판이다. 

한데, 내가 거쳐온 일부 집단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나는 무력했고, 비겁했으며, 어쩌면 방관자였을 따름이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말수가 적고 좀처럼 화를 잘 내지 않아서 은근히 괴롭힘을 받는 아이가 있었다.

직접 위해를 가한 적은 없지만, 괴롭히는 게 뻔한 남의 행동을 보고도 그에 반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부모님보다는 또래관계 형성이 중요했던 시기에, No를 선뜻 말할 수 없었다.

가담하지만 않았을 뿐, 그 아이의 눈에는 방관하는 모두가 다 똑같은 가해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들과 돌이켜 회상해보면, 하나같이 말한다.


"그 때 왜 그랬을까? 걔가 지탄받을 행동을 했던가?"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유로 비웃거나 깔보거나 희화화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얻을 실익도 없고 재미도 없고 애초에 그 상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허나, 어떤 집단에서는 특정한 이가 위선을 떤다며 고까운 시선을 내비치곤 했다.

상대에게 직접 힐난을 하진 않았으나 우리들끼리 왈가왈부하는 걸 보고도 신경쓰지 않았다. 

별다른 의견을 표명하진 않았어도, 우연히 그가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 역시 똑같은 이들로 비춰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을 했고 결실을 얻어 잘됐다고 생각은 하나,

그저 내면의 생각으로만 그쳤으니, 결과적으로는 그 집단에서 간접적 린치를 가한 것과 진배없다.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속한 집단을 거스를 만큼 소신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셈이다.

그러니, "나는 안 그랬어." 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테지. 

집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그러던 언젠가, 내가 특정 집단의 대상이 되고 만 일이 있었다. 

사실, 수년간 한 번도 의견 차이로 다퉈본 적이 없었다. 갈등이 전혀 없는 관계가 곪는 줄도 모르고. 

그저 어느 순간 인식이 바뀌었던지 아니면 상호 간 환경이 달라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특정 행동이 점차 상처가 되었고, 그게 상처였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공동의 적이 되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나간 자리에서 특정인은 말이 없었고 누군가는 집요하게 질문을 해댔다.

아주 크나큰 벽을 만난 것만 같았고, 이게 청문회인지 대질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내 의견에 답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질문만이 쏟아졌을 뿐이다. 

명확히 알 수 있었던 건, 그들은 일관되게 나의 오점만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서운한 점을 얘기하니, 단호하게 들렸던 답 하나는 "사과하길 바라는 거냐" 라는 말이었다. 

듣는 순간 직감했다. 아, 이들은 내 얘기를 들을 생각이 없고, 나를 상처줬던 행동은 그저 떳떳한 것이었구나. 


스스로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혹시라도 무심코 행했을 행태들이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거듭했다. 

사실, 어떤 행동과 표현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구체적인 일화를 예로 들었던 나와는 달리 그들은 말이 없었다. 내가 관심법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닌데.

무엇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그걸 떠나서 내 앞에서 자기들도 상처를 받았다고 얘기하는데 마음쓰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다만, 모두가 내게 등 돌리고 있는 개인:다수의 상황에서 유감을 표명하는 것엔 용기가 필요했는데... 

대면한 자리에선 정작 아무 말이 없더니, 며칠 뒤 뜬금없는 통보식 연락이 왔다.

직접 해명을 듣고자 전화를 걸었으나 대화를 거부하더니 또 통보했다.  

요지는 다 내 탓이란다. 자기네들이 상처를 받았단다. 그걸 끝으로 그들은 나를 일제히 차단했다.

그들 중에 혹자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허나, 내 알바가 아니다. 개인은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는 이와 집단을 거스르기 어려우니.

원망스럽지 않으냐고 내게 물어보면, 찰나엔 그랬다고 하겠다. 오래 그래봤자 무엇하리.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고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불면증이 생겼고, 힘이 나질 않았다.

고충을 얘기하진 않았으나 사정도 모르고 그저 매일 다정하게 웃어주는 남편이 위안 중 하나였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나를 걱정하는 엄마도 종종 연락을 해서 내 안부를 묻곤 했다. 

시선을 돌리니, 주변에 좋은 인맥들도 꽤 많이 있음을 깨달았고, 이내 감사의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시간이 온전한 답은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집착을 내려놓으니 한결 편해졌다. 

묵은 인연이 끝나니, 새로운 인연이 몸 속에 움트기 시작했다.

아가야, 부디 건강하게 태어나렴. 이제 바라는 건 오직 그 뿐이야. 


#갈등 #도덕 #개인윤리 #조직윤리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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