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릇한 봄이 끝나가고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점점 더워지던 날씨에 그늘 하나 없는 밭에서 일을 하니 목이 많이 말라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잔 까닭에 정란은 동이 틀 무렵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깼다.
'아직 새벽이네? 화장실 가기 무서운데 참을까? 진철이 깨워서 같이 가까?
됐다마. 이제 혼자 가보자. 세상에 귀신이 어데 있노?‘
마당 옆 푸세식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저 멀리 희미하게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옴마야, 귀신이가?‘
다급히 집으로 들어가려다 한쪽 신발이 벗겨진 정란은 얼른 집어 들고 마룻바닥으로 다가가다 그 울음소리가 아버지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아버지 목소리 흉내 내는 귀신이가? 섬뜩해 죽겠네.
해뜨기 전 새벽에는 귀신도 다 집에 들어갈 시간이라 카드만 순~ 뻥 이었네.
내일 학교 가서 애들한테 그거 거짓말이라고 얘기해 주야겠네.‘
이제 곧 어머니가 일어나셔서 밥을 하실 시간이라 정란은 더 자지 않고 숨어있다가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방안으로 조심히 들어가 정란의 이부자리로 들어가려다 아버지, 어머니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디 가셨나? 새벽에 어디를... 설마 아까 그.. 소리가 아버진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따라 걸어 나간 정란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느티나무 앞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
느티나무는 마을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나무인데 소문으로는 지난 백 년 동안 번개 맞아도 끄떡없고, 태풍이 와도 혼자만 살아난 나무라고 들었다.
'아버지 저기서 왜 우시노? 혼자 뭐 하시노?
왜 바닥에 앉아 계시지?‘
도무지 이상하고 괴이한 장면이었다.
"아버지, 왜 여기 계십니꺼?
어머니 어데 가셨는지 안보입니더. “
"정란아! 여 오지 마라!! 니 보면 안 된다!!
가서 이모 깨워라, 퍼뜩!!!!
이모 여기 오라카고 다른 애들 여 몬 오도록 해라,
빨리 가라. 보지 말고 어서 가라!!! “
"아.. 예.. 그라믄 이모 깨우러 갈께예 “
좀처럼 말씀도 자주 없으시던 아버지께서 눈물을 보이시며 화를 내시니 더 궁금해진 정란은 뒤돌아 힐끔 쳐다보다 어머니 발목과 신발을 보았다.
흙이 많이 묻어 희미한 보라색이 된 낡은 고무 신발인데 어머니가 가진 유일한 신발이라 한 번에 알아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다치셨습니꺼?
무슨 일인데예?? “
"오지 마라. 정란아, 니 보면 안 된다!!! “
"제가 업을께예, 제가 어머니 업고 가면 됩니더, 어머니 가벼워서... “
아버지 등 뒤까지 가까이 다가간 정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기운 없이 축 늘어져 누워있는 어머니의 목에는 두꺼운 하얀색 빨랫줄이 감겨있고
고운 어머니 얼굴색이 무섭게 변해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일어나 보이소!!!
와 이라는 데예!!
아버지, 어머니 깨워 보이소,
목에 이건 왜 두르고 계십니꺼,
어머니, 어머니!!!! “
"정란아, 아버지 말을 와이리 안 듣고 니가 우짤라고 이거를 보고 있노,
내가 이제 우예 살아야 하노.
정란아, 니 인자 우짤라고이라는 기고.
아버지 말 들어라, 가서 이모, 이모부 깨워라.
니는 퍼뜩 가거라. 니 큰일 난다 안카나!!! “
울부짖으며 통곡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정란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이모 집으로 달려간 정란은 오늘따라 일찍 일어나 마룻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이모, 이모부에게 빨리 마을 입구 느티나무로 가서 어머니 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정란은 이모와 같이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집으로 돌아가 남자 형제들을 깨워 학교를 보내고 막냇동생을 돌보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이모가 집으로 오셨다.
"옥단 이모, 어머니 병원 가셨습니꺼?
어머니 무슨 병입니꺼?
우째 됐습니꺼?
왜 쓰러진 건데예?
병원에 더 계셔야 합니꺼? “
"정란아, 정신 단디 챙기고 이모 말 들어라이,
느그 어머니.. 아이고 우짜겠노,
언니야 이 어린애들을 다 놔두고 눈이 감기더나.
아이고 우짜믄 좋노. 정란아 이모 입이 안 떨어진다,
우예 말해야 하노.
언니야 아이고 언니야, 언니야... “
말을 못 하겠다며 펑펑 우시는 옥단 이모의 말속에서 마치 예언이라도 되는듯한 끔찍한 직감에 정란은 이모의 말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이모, 내가 가볼께예, 어느 병원입니꺼?“
"오빠들하고 동생들 다 학교 갔나? “
"예, 곧 올 겁니다. “
"그라믄 그때 다 같이 가자, 밥은 뭇나?"
밥 얘기에 또다시 옥단 이모의 눈물샘이 터지고,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정란 역시 이모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마룻바닥에 앉아 있기만 했다.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누구의 말도 듣기 싫었다.
등에 업혀 잠든 막내와 정란은 오빠, 동생들과 함께 이모를 따라나섰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걸어서 족히 한 시간은 넘기에 큰오빠 만철이 정란에게 고생이라며 막내를 안고 가겠다고 했다.
작은오빠 원철은 여섯째 경철이 손을 잡고, 나머지 동생들도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누구 하나 배고프다며 응석 부리지도 않고 싸우거나 장난치지도 않았다.
옥단 이모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데 병원 가는 길이 아닌, 근처에 있는 이모네 집이었다.
"어머니 여기 계십니꺼?
병원 안 가고 왜 여기에 계십니꺼? “
큰오빠 만철의 질문에 이모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정란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모네 집 대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던 정란의 귀에 먼저 들어간 큰오빠의 통곡 소리와
그 소리에 놀란 막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마,, 진짜가.. 내가 생각하던 게..‘
반나절 사이 수척해진 아버지가 정란에게 다가와 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정란아, 들어가서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드려라.. “
"싫어예, 마지막은 무슨 마지막입니꺼?
쪼매 다친 것 가지고 뭔 마지막이란 소릴 하십니꺼 아버지는. “
눈이 팅팅 부어 쌍꺼풀이 사라진 옥단 이모는 콧물이 가득 찬 코맹맹이 소리로 정란을 위로했다.
"정란아, 어머니가 항상 니 덕분에 힘이 난다고 하셨었데이.
니 없으면 우째 사셨을까 싶다.
마지막인데 인사드리고 잘 보내 드리자..
편하게 보내드리자... “
"싫어예! 힘이 났다는 사람이 우째서 지금 저기 누워있습니꺼?
힘이 났으면 그 힘으로 살아야지예!!! 왜 그 새벽에 혼자 나갔습니꺼?
우리를 놔두고 어머니는 혼자 가면 끝입니꺼?
그렇게 가버리면 저는예?
어머니 혼자 편하게 가라고 하이소.
저는 편하게 못 보냅니더, 못 보냅니더!!!!! “
정란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몇 시간째 머릿속을 빙빙 맴돌던
느티나무 앞 어머니의 모습을 애써 지우려 노력하며 잘 참아왔는데
그 모습이 정말 마지막이었다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모, 어제 어머니 저녁 준비하실 때 내가 막내를 업고 걸레질했어야 했어예,
어머니 허리 많이 안 좋은데 내가 어제 낮에도 고추를 덜 땄어예,
너무 더워가 물 마신다꼬 들락날락거리기만 하고 어머니 못 도와드린 것 같아예,
내가 배구에 미쳐갖고.. 매일 늦게 집에 왔어예,
내가 많이 못 도와드려서 어머니가 떠난 것 같아예, 우예 삽니꺼?
불쌍한 어머니 우예 보냅니꺼.. “
정란은 스쳐 지나가는 과거 속에 작디작은 실수라도 잡아 이유를 찾아보려 애썼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정란아, 니 탓 아니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어머니 편안히 보내드릴 생각만 하자,
아버지 챙겨야지, 저러다 아버지마저 쓰러지실까 봐 겁난다. “
이모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항상 커다란 거인처럼 보이던 아버지가 넋을 잃고 기둥에 기대어 겨우 앉아 있는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다.
정란은 일어나 마루에 앉아 계신 아버지를 지나 이모 집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를 다시 마주할 자신은 없지만 이렇게 보냈다가 먼 훗날 후회를 남기게 될까 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쏟아내고 싶었다.
반나절 동안 궁금했던 장면에 대해 따지고 싶었다.
동그란 문고리를 힘껏 당겨 들어간 방안에 어머니는 그새 목욕이라도 하신 듯 깨끗한 얼굴에 도화지처럼 하얀 옷에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어머니.. 편안하십니꺼.. 이제 가니까 좋아예..?
내가 잘못했으니까 어머니 이제 좀 일어나 보이소..
오빠고 애들이고 다 이래 울고 있는데 왜 자꾸 누워계십니꺼...
일어나 보이소, 어머니 제발 좀 일어나 보이소!
가지 마이소, 가지 마이소.
엄마!!!! 왜!!! ....... “
문밖에서 넋이 나가 있던 아버지는 정란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정란아.,
니가 이라믄 어머니 못 간다. 좋은데 못 갈 끼다...
그동안 힘들고 많이 아팠는데,
이제 보내드려라. “
"아버지는 새벽에 엄마 왜 안 말렸어예?
왜 몰랐냐 말입니더.
나무 밑에서 뭐 했어예?
퍼뜩 병원 안 가고 왜 울고만 있었냐고예!!!“
똑바로 뜬 정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정란아.
아버지한테 다 토해내고 뱉어내라.
그래야 니가 산다.
니가 살아야 한다.
아버지가 다 잘못이다.
아버지가 죄가 많다. “
아버지는 정란의 눈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셨고
오빠들은 정란에게 다가와 나무 이야기가 뭐냐고 캐묻기 시작했다.
정란은 입을 닫아버렸고, 아버지는 바닥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모의 중재로 겨우 조용해진 방 안에서 이모는 장례 얘기를 꺼내셨다.
좋지 않게 떠났으니 동네방네 떠벌리지 말고 조용히 장례를 지내자는 의견에 아버지는 동의하셨다.
떠날 때조차도 조용하고 외로운 인생이었다.
퍼뜩: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