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편지란 어떤 의미인가요

당신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by 아알미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편지를 쓰려니 조금 긴장이 되네요. 그것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쓰는 편지라니. 마치 어릴 적으로 돌아가 펜팔을 보내는 기분입니다.


당신은 편지를 자주 쓰시는 편인가요? 저는 편지를 쓰는 걸 좋아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럴 기회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카카오톡 메신저나 문자, 그럼에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곧바로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면 되니까요. 그래도 생일이나 연말처럼 특별한 경조사가 있으면 직접 손으로 편지를 쓰곤 합니다. 아, 저는 자고로 편지는 예쁜 종이로 된 편지지에 펜으로 쓰는 게 정석이자 그 본연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과 어울릴만한 편지지와 봉투를 직접 고르고 또 이왕이면 썼다 지울 수 있는 연필보다는 선명한 볼펜으로 쓰는 게 문장 하나하나를 쓸 때 더 신중하게 진심을 담아 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당신께 쓰는 편지도 이왕이면 수기로 쓰고 싶긴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겠지요. 그래도 저는 이 편지가 온 우주를 유영하다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을 이름 모를 당신께 운명처럼 전해질 상상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은 어떤 곳인가요. 일까요, 일까요.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요.


좀 전에 펜팔 이야기를 했었죠. 당신은 펜팔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저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에 한 경험이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제 또래 여자 아이와 몇 년 동안 이메일로 편지를 주고받곤 했어요. 처음에는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영어로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영어 실력을 올리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제가 펜팔 사이트에서 매칭이 된 친구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밝고 착한 아이라 조금은 낯선 펜팔의 첫 경험이 저에게는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로 일상 사진을 공유하거나 고민 상담을 해주기도 했고, 인사동에서 한국 관광 기념품 같은 것들을 사서 제 인생 처음으로 바다 건너 멀리 택배를 보내보기도 했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연락 횟수가 줄어들었고 현재는 더 이상 편지를 주고받지 않지만요. 어쩐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어요. 저의 내성적인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즉석에서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편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여러 번 곱씹어서 실수한 게 없는지 내면의 검열의 시간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제 생각을 남들에게 보여줄 용기가 생기거든요. 그런 점에서 글 쓰기는 저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글짓기 관련으로 자주 상도 탔었고, 운 좋게 대학도 논술로 합격했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스무 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니 저보다 훨씬 재능 있는 친구들이 많더군요. 오만하게도 저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 꼭 그렇지 만은 않다는 걸 몸소 체감하고 나니 글 쓰는 게 조금 무서워졌던 것 같습니다. 또 취업 준비 등 여러 상황 상 바쁘다는 핑계로 나중에 몸도 마음도 여유로워지면 그때 글을 쓰자, 하고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글을 쓰는 방법을 조금씩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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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제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험이 있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고 나니, 아니 실은 그 시험을 치르기 훨씬 전부터 제 내면에선 다음으로, 또 그다음으로... 계속해서 미뤄뒀던 말들을 이제는 꺼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구상해 놓았던 단편 소설이 있거든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메모장에 조금씩 써 놓았던 내용들을 기반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역시 쉽지 않았어요. 건드리기가 무서워진달까. 그런 기분을 이해하시겠나요? 제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들을 제 손에서 구현될 순간들만 기다려왔는데, 제 이상이 현실과 다를까 봐, 제 상상 속 세계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졌습니다.


사실 소설이란 것도 하고 싶은 말을 주인공이 펼쳐나가는 이야기 뒤에 숨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음, 마치 '내 친구 이야긴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본인의 연애 상담처럼 말이죠. 저도 그런 점에서 평소에 보다 직접적인 에세이보다는 간접적인 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인 만큼, 그리고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들이 넘쳐나는 현재 이 순간에는 자꾸 숨으려고만 하지 말고 좀 더 솔직하게 글을 써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글이 많이 길어졌지만 이게 제가 이곳에서 편지를 쓰기 시작한 이유예요.


보통의 에세이처럼 글만 쓰는 것은 영 재미가 없잖아요.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말 한마디 내뱉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저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 어릴 적 막연하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갔던, 마치 펜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던 시절처럼 솔직하고 진심이 담긴 글을 다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요즘, 꼭 많은 사람들이 아니어도, 제 편지가 단 한 명의 누군가에게라도 닿아 조금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면 그것 역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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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발송하는 곳이 '그런 편지'인 이유도 말씀드려야겠지요. 거창한 뜻은 없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한 때 동경했던 사람에 대해 추억할 때가 있죠.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거나 그 사람과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남아있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그 영화는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그런 영화였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사람은 '내게 있어서 10대 시절을 따뜻한 기억으로 만들어준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테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우리 곁에 남아있는 것은 찰나의 이미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 같은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제 편지도 누군가에게 어마어마한 서사를 안겨주지는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돌이켜봤을 때 '~한 편지였어. 그런 편지였어.' 하고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음, 얼마 전에 영화 <알라딘>에서 알라딘과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 이성세포를 맡았던 심규혁 성우가 쓴 <목소리가 하는 일>이라는 책을 읽었었는데요. 사실 영화나 게임, 광고를 통해 성우의 목소리는 우리 일상에서 비교적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성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잖아요. 친밀하면서도 한편으론 낯선 사람, 그런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오히려 균형감 있게 제 삶을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가까운 사람이 하는 말들은 괜히 잔소리처럼 여겨지거나 내 고민에 대한 북돋음도 괜히 뻔한 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랄까요.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또 먼저 인생을 산 선배로써 이렇게 극복해 냈구나, 하는 것들 말이죠. 제 이야기도 때론 당신의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거나 조금은 멀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거나 당신의 복잡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우주에 혼자 버려졌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도 그렇고요.


첫 번째 편지라 그런지 글이 길어졌네요.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날이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근처 공원 한 바퀴 산책을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마지막으로 밤에 듣기 좋은 음악을 하나 추천합니다. 지브리 영화 <귀를 기울이면>의 OST 중 하나인 Flowing Clouds Atop the Shining Hills입니다. 부디 평안한 밤 보내세요.


다음 편지에서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