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당신에게 보내는 다섯 번째 편지

by 아알미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고 계셨나요. 봄이 한창일 때 당신에게 처음 편지를 썼었는데 벌써 여름이네요. 지난겨울에는 유독 겨울 옷이 무거워서인지 마음이 축축 처지는 날들이 많았는데요. 그럴 때마다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훌쩍 가벼운 옷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뜨거운 햇볕과 눅눅한 흙냄새, 풀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다니.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편지를 못 썼어요. 혹시 제 편지를 기다리고 계셨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약 10년 만에 이사를 준비하느라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답니다. 원래 집안일이나 청소 같은,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는 일들을 좋아하는 터라 이삿짐을 챙기는데 육체적으로 힘든 건 아니었지만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어요. 편지를 쓰려면 진심을 내보여야 하는데 익숙해진 것들과 이별을 해야 하는 제 내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면 그만 무너져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우리에게 정해진 이별이 없는 것처럼 제게 익숙하면서도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마음에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늘 그랬듯이 이어폰을 끼고 오전 10시가 좀 넘어서 제가 좋아하는 산책길을 따라 걷고, 풍경을 감상하고, 이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으면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 오랜만에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눈물 펑펑 흘리며 영화도 보고, 집 가는 길에 대형 마트에 들러 간단히 먹을 것들을 사가는 일상. 그런 일상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슬퍼하느라 놓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게 진실을 외면하는 방식이라 하더라도요.


'퀘렌시아'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예전에 어느 책에서 처음 알게 된 단어인데요. 스페인어로 안식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투우 경기에서 소가 잠시 숨을 고르는 영역을 뜻하기도 하고요. 소가 퀘렌시아에 있을 때에는 그 누구도 소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힘든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각자의 퀘렌시아가 존재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한동안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요.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어쩌면 제 퀘렌시아는 제가 살았던 동네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곳에서 영화에 대한 재미를 더욱 키워나갈 수 있게 되었고, 미친 듯이 영화를 보러 이곳저곳 영화관을 탐방하던 시절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기에 제 마음이 한결 안심되었던 것 같거든요. 그런 점에서 제 마음의 '안녕'을 심어준 그 동네는 제게 있어서 참 애틋하고 자꾸만 마음이 가는 장소예요.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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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순간들

하지만 아름다운 동네와는 별개로 10년 동안 좁은 원룸에서 살다 보니, 점점 쌓여가는 물건들도 많았어요. 옷 욕심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아빠를 닮아 추억이 있는 물건들은 쉽게 못 버리는 스타일이라 옷장에는 빈틈이 없을 만큼 옷이 빼곡했고요. 최대한 많은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 모든 벽면에는 책장이나 선반이 놓여 있었어요. 처음에는 방 너비와 사이즈에 맞게 수납할 수 있는 최적의 아이템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그런 지혜를 발휘할 줄 아는 제 자신이 나름 기특하기도 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방 안을 둘러보니 숨 막힐 것처럼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혼자 살 때는 그리 불편한 점도 없었고, 서울 한복판에 내 한 몸 뉘어 잠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기는 하지만 이따금씩 제 방을 바라보는 제 3자의 이유 모를 탄성을 듣자 하면 제 자신이 조금은,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좁은 방에 익숙해지면서 나 스스로를 늘어나는 짐만큼이나 무겁게 가둬두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요. 때때로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서야 제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이사를 결심했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짐을 덜어내기 위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제 인생 두 번째 자취방이 되었는데요. 첫 자취방보다 훨씬 넓어진 만큼 생활 여건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마음이 여전히 불안하기는 해요.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거기 있는 느낌이랄까. 예전 동네가 그립고, 어디를 가든 자꾸 비교하려고 하고. 이렇게 투정 부리면 안 되는데 말이죠. 그래도 잘 적응해보려 합니다. 예전 동네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좋은 인연을 만났고, 그 동네를 걸어 다니며 많은 영감을 얻었듯이 이곳에서도 저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줄 새로운 순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리고 그런 날들이 하루하루 쌓여 당신에게도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별은 몇 번을 반복해도 새로운 느낌으로 찾아오는 듯합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겠지요. 집이든, 사람이든, 아니면 인생의 소중한 의미들이든. 혹은 저처럼 지금 이별의 상황을 애써 받아들이며 극복해 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을 수도요. 그러한 순간들이 버겁더라도 조금만 견디다 보면 곧 슬픔의 무게만큼이나 좋은 일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애초에 그런 이별이 있다는 건 그만큼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니까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그냥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제게 다가올 미래를 겸허히 받아들일 마음으로, 늘 그래왔듯이 뚜벅뚜벅 걸어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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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네에서의 발자취


마지막으로 요즘 같은 계절에 꽤나 잘 어울리는 스파이에어의 두 곡을 추천해 드려요. 'little summer''네가 있던 여름' 입니다. 두 곡 모두 여름의 해질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청춘 음악이라 제가 매우 좋아하는 곡들인데요. 'little summer'가 막 여름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그 벅찬 감정을 부르는 노래라면, '네가 있던 여름'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 그 시절의 여름을 떠올리며 부르는 듯합니다. 이 두 곡을 들으면 제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아서 그 동네가 너무 보고 싶어질 때면 다시금 꺼내 듣곤 합니다. 여태껏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단호히 '겨울'이라 답했던 제가 이제는 '여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그리운 풍경의 사진을 하나 첨부하며 이만 글을 줄입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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