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나 자기 주변을 의심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사람들의 방심과 충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고들을 예측할 수 없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되거나 본인의 안전이 법과 질서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선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들을 모두 의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어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고가 반복된 일상에 무뎌진 감각이 사고의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발생하는 것이란 걸 생각하면 안전을 의심하는 행위야말로 오히려 안전을 추구하는 행동이라는 역설적인 결론이 나온다.
예컨대 어두운 밤에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내 뒤를 쫓아오는 것 같은 저 낯선 이를 피해 밝은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 운전 중에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있는 저 옆 차선의 차를 추월하기 위해 가속페달을 밟는 것, 호감형의 외형으로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수상쩍은 거래를 제안하는 저 사람을 의심하는 것, 이것들 모두가 의심에서 비롯한 방어와 회피이기에 어느 누구도 결코 믿음이 없다던가, 과하다는 이유로 이 불신 행위를 비난하지 않는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쫓아오는 저 사람이 주머니 속에 흉기를 숨기고 있었거나, 위태롭게 휘청거리던 저 차의 운전자가 졸음을 견디지 못해 무의식 속에서 핸들을 잡고 있었거나,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던 그 사람이 내 믿음을 보기 좋게 배신했다는 사실들은 이미 사건이 벌어진 뒤에 알려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믿음과 낙관적인 사고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같고, 사고와 범죄는 이 순간의 방심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의심의 방어적인 역할은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온갖 사고의 위험성을 가진 집 밖의 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온갖 변심이 개입할 수 있는 인간관계 역시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웃고 떠들며 잘 지낸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날 대하는 태도와 언행에 한기가 돌 때나, (게다가 이러한 이유에 관해서 물으면 절대 대답해주지도 않는다!) 나는 가깝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열어주고 있었던 사람이 사실은 나를 별 볼 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나, 혹은 둘도 없는 것 같던 내 절친이 어느 순간 내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적수가 되어 내가 들인 노력과 마음에 배신을 당하게 되었을 때와 같은 이런 상황들 역시, 현재 상황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미처 방어기제를 세우지 못한 나머지, 갈등에서 생긴 아픔과 배신감을 여과 없이 받아야만 하고 이 때문에 실제적인 통증이 느껴지는 외상보다도 더욱 큰 쓰라림과 아픔을 느끼며, 흔히 ‘상처 받았다’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회복과 복구가 가능한 신체와 재물의 손상보다도 좀체 아물지 않는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가 더욱 통렬하기에, 우리 모두가 그토록 사람의 온기를 원하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걸 꺼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인간관계 속에서 의심이란 사람의 마음이 끝없이 변덕적이기에, 지극히 우연으로 맺어진 사람과의 결속력이 내가 온 정성을 쏟아부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 사람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것,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저 사람의 친절이 온전히 나와의 친분을 위한 순수성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저 서로 간 적당한 거리 가운데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끼리 일시적인 교집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관계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굳이 인간관계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겠다.
하지만 또 의심이 너무 과해져서 불신이 습관화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적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위험상황에 몰려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면서 과보호로 인한 공격성을 상대에게 표출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의심은 더 이상 방어가 아닌, 방어를 빌미로 상대를 공격하는 폭력이 된다.
밤길에 날 쫓아오는 사람과 거리를 벌리는 행동은 나 자신의 보호와 알 수 없는 상대를 향한 섣부른 판단을 자제하는 의미도 가지기에, 이 행동은 합리적인 보호로써 이해받을 수 있지만 그저 막연한 추측으로 그저 내 뒤를 따라 걷던 무고한 사람에게 선제공격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과보호로 인해 무고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 되며 자기 보호가 아닌 사회질서를 해한 행위로 간주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신은 감정적인 소모를 너무 많이 일으킨다, 내 주변이 항상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마음이 한시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고, 사람들의 본심이나 진의를 파악하기 바빠, 사소한 호의나 호감에 기뻐할 틈도 없을 것이며, 모든 상황에 숨겨진 저의가 있다고 믿은 나머지, 모든 게 참을 수 없이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불신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켜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졌을지는 모르지만, 일상에서 주어지는 사소한 기쁨이나, 평안에 결코 만족할 수 없으니 전보다 불행해지는 것은 확실하다.
결국 성숙한 의심이란, 모든 것에 적당한 거리감을 둘 줄 아는 것이다. 너무 과신하여 큰 충격에 대비 못 하는 일이 없도록, 너무 불신하여 당연하게 주어지는 행복조차 못 보는 일이 없도록, 너무 깊게 애정 한 나머지 사소한 일로도 배신당하지 기분이 들지 않도록, 너무 멀리한 나머지 스스로를 외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