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양보의 딜레마
나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때까진, 학교와 집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서 매일 도보로 등하교를 하곤 했다. 매일 아침마다 맞이해야 했던 그 등굣길에 대한 기억은 이른 아침의 무거움과, 매일 봤던 지루한 이미지의 반복으로 점철돼있어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실컷 포장해도 마땅히 좋은 기억이 없을 정도로 무감각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면서 등교 거리가 멀어지다 보니, 매일 걸어서 등하교를 했던 초중고 시절보단 확실히 시내버스를 자주 이용해야했다.
시내버스를 이용하다 보면, 확실히 걸어 다닐 땐 마주할 일 없던 낯선 사람들과도 최소한의 접점이 생기게 되기 마련이었다. 물리적인 거리도 한껏 좁아지거니와, '같은 버스'에 탔다는 교집합을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꽉꽉 들이찬 버스에 손님을 넣으면서 '뒤로 좀 가주세요'라고 소리치는 버스기사의 기계적인 외침을 듣는 것이나, 내 옆 사람의 손에서 놓친 것들을 대신 주워주며 가벼운 감사 인사를 받게 되는 것이나, 목소리를 조절할 줄 모르는 어르신들이 통화로 자신의 개인사를 크게 떠드는 걸 듣게 되는 것은, 크고 넓은 도보를 무신경하게 걸을 때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시내버스만의 비좁은 거리감이었다. 하지만 이 특유의 비좁음을 불편함이 아닌, 삶의 생동감이라고 느끼게 된 건, 내가 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하며 여러 형태의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우리 학교는 버스 노선의 종착점이라서, 하교를 할 때면 첫 번째로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어지간히 사람이 많은 날이 아니었다면 무조건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다 보면, 버스 좌석은 이미 우리 학교 학생들이 다 앉고 있어, 그 후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겉보기에도 우람하고, 튼실한 체구를 지녀서 웬만하면 나보다 더 자리가 필요할 어르신들에게 좌석을 양보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다 보면 그분들이 보이는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중히 거절하시다가도, 내 집요한 요구에 마지못해 앉게 되시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분명 누가 봐도 나보다 자리가 더 절실해 보이셨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꼭 한 두 번은 손을 저으셔서, 내가 좀 더 강권해드려야 겨우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게 되시면 고맙다는 인사를 잊는 법이 없으셨고, 때로는 내릴 때도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해주곤 하셨다. 이런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되면 꽤 먼 거리를 서서 가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이 흐뭇한 기분으로 가득 차곤 했다.
두 번째는 반갑게 내 호의를 받으시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자리를 양보받으면 '하이고 다행이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잽싸게 자리에 착석하셨다. 물론 그렇다고 그분들이 감사인사를 생략하거나, 호의를 받고도 무례하게 나서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나는 그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면, 앉을만한 자리 하나가 저렇게 반가울 정도로 몸이 불편하신 걸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분들의 감사 인사를 받고 나서도 항상 어쩐지 모를 안쓰러운 기분에 잠기곤 했다.
세 번째는 다소 무뚝뚝 히 내 호의를 받으시는 분들이었다. 이 분들은 자리를 양보받을 때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젓는, 단 몇 번의 몸짓 만으로 수락과 거절, 감사의 의사를 모두 내비치셨다. 사실 이분들이야 말로 낯선 사람들 간의 사이에서 보일 법한 가장 현실적인 반응이어서, 나는 그분들이 보여주는 무뚝뚝함에도 결코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간소화되었다 뿐이지 그분들도 감사 인사를 생략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흔쾌히 자리를 양보할 수 있었다.
네 번째가 바로 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는데, 그것은 내 호의를 무시하거나, 혹은 다소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내가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어서는 것을 보면,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저으며 명백한 불쾌함을 내비치시거나, 아니면 나를 몇 번 흘기면서 아예 획 지나쳐 버리시곤 했다. 나는 어차피 다시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가면 그만이었기에, 그분들의 행동에 특별히 기분 나쁠 것은 없었지만, 조금 궁금하긴 했었다.
뭣 때문에 그리 불쾌해하셨을까?
나는 어느 날 퇴근하고 오신 아빠의 말을 듣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날 아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자마자 우리에게 쏟아내듯이 하소연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할머니하고 손자가 같이 탔었어, 근데 이 할머니가 손자한테, '빨리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라고 말씀하시더라고? 아니 근데 내가 아무리 봐도 할아버지는 아닌데, 정작 진짜 할머니이신 분이 나한테 그러면 어떡해, "
우리는 그 얘기를 하나의 해프닝처럼 듣고 크게 웃었지만, 아빠는 그런 우리를 보고 허탈하게 웃으시며
"내가 그래도 할아버지는 아니잖아?"
라고 재차 물어보시기까지 하셨다. 물론 내 눈에 아빠는 할아버지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공장의 엔지니어 다운 우람한 팔뚝으로 무거운 짐을 능숙하게 들고 옮기시는 정정한 중년이셨다. 만약 누군가 아빠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면, 나는 첫번째로 '엥?' 하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버스에서 자리양보를 거부하시던 그분들이 보이는 반응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자리양보에 주로 불쾌한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노약자라고 부르기엔 정정해 보이셨고, 그렇다고 봉미선(짱구 엄마)이나 아따맘마의 아리 엄마 같은 한창때의 아주머니(?)보단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대게 50대의 남성, 여성 분들이셨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고바야시 미도리는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가장 큰 장점은, '나 돈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왜냐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나 돈이 없어'라고 말하는 건 사실이 되기 때문에.
20대들이 반 오십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서서히 흘러가는 청춘을 자조하는 말이었지만, 실제로는 본인들도 전혀 늙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 할 수 있는 일종의 여유였다. 하지만 매일 머리가 희끗해지고, 머리숱이 헐빈 해지며, 날로 늘어가는 주름살을 실감하는 사람들에게 노화는 더 이상 장난이 아닌 실제적인 공포였다. 그들이 '나 늙었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조가 아닌 자해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을 키우며 어느새 잃어버린 자신의 신체 나이를 돌려받기 위해, 그렇게나 기능성 식품을 찾아먹고, 안티에이징에 집착하며, 더 이상 세월에 흐름에 자신의 신체를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거절하는 그분들의 모습이 단순한 불쾌함이 아닌, 두려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분들이 받는 젊은이들의 양보는 단순한 호의가 아닌, 오늘 아침 하나 더 늘어난 주름 한 살처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노화의 증거와도 같았을 것이다. 아마 그들이 나를 보며 손을 저은 것은
'아니, 내가? 나 아직 그 정돈 아니야'
라는 의미 아니었을까.
화장품을 공부하면서 사람들에게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장사해야 할 내가, 노화를 두려워할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깨달음 이후론, 버스 문 앞에 조금이라도 연식이 있으신 분이 탈 것 같으면, 곧 내릴 것처럼 일어나 자리를 비우곤 했다. 호의를 베푸는 것은 아니고, 그저 일어날 때가 돼서 자리를 비워준 것뿐이라는 느낌으로. 내가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우면, 일부는 금방 일어난 나를 몇 번 힐끔이다 자리에 앉거나, 대부분은 그냥 편하게 자리에 앉으셨다. 나는 그렇게 앉으신 분들을 옆에서 쳐다보며,
"나이 드셨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자리가 빈 거니까 편하게 앉으세요.'
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