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군대 이야기 1
넷플릭스에서 한창 DP가 유행했었을 당시에, 꽤 많은 사람들이 제게 이렇게 묻곤 했었습니다.
"네가 근무했던 부대에서는 부조리가 심했어?"
그럴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요, 부조리 같은 건 없었어요"
제 첫번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여러 반응을 보이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좋은 부대 가서 다행이었네, 같은 조심스런 말들을 하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꿀빨았네, 군생활 날로 먹었네 같은 짓궃은 말을 하곤 했었죠, 제가 들었던 그 어떤 반응 중에서도 저를 기분나쁘게 하는 말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 사람들 모두 제 두번째 말을 듣곤 하나같이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조리가 없었어요, 왜냐면 사람 한명이 자살 했었거든"
인명사고
때는 18년 6월 27일, 제가 입대한지 3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제 막 훈련소와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자대로 전입오면서 본격적인 군생활을 맞이하고 있었던 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서툰 이등병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점호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중대원들은 마치 감방의 죄수처럼, 오늘도 자신을 옥죄는 수많은 날짜 중 하나를 무사히 소모했다는 비굴한 만족감에 취해 주변사람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저녁점호가 시작도 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늘어지고 있었죠. 점호 지휘를 하셔야 할 사관님이 병사 두명을 데리고 어딘가를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는 모습에서, 중대원들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대원들은 그제서야 집합 장소에 '김일병'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의 부재를 깨달은 그 순간부터 '걔 어디 갔냐?' '지금 걔가 없어서 점호 시작이 안되는거 아니냐?' 같은 말들을 쏟아내며, 김일병을 이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죠. 하지만 중대원들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김일병은 평소에도 시간약속을 잘못 지켜서 이따금씩 점호 시간이나 근무 보고시간에도 늦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기 때문에, 분명 이번에도 같잖은 이유로 어딘가에 짱박혀 있다가, 점호 장소에 늦게 나오는 것이겠거니 하며 지레 추측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조차 비정상적으로 길어지자, 중대원들은 하나씩 짜증과 불안이 섞인 농담을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씨, 탈영한 거 아니야?"
아마 이때부터 중대원들은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인 범주의 일이 아님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던 것 같았지만, 군대에서의 반복된 나날로 위기의식이 마비된 그들에게 있어선, 아마 '탈영' 정도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일탈이었나 봅니다.
저 역시 동기들과, 같이 생활하던 간부(신임 간부들은 몇 주간 병사들과 같은 생활관에서 지내야했습니다.)에게 '김 하사님, 지금 탈영병 잡으면 바로 중사 다시는 거 아닙니까?' 정도의 농담을 하며 이 순간의 긴장을 조금씩 해소시키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잔인한 농담이 아닐 수 없지만, 그 농담의 배경에는 제가 알고 있던 그 김일병이 최소한 탈영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일련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자대 생활을 한지 1달도 채 되지 않은 저였지만, 그런 제게 있어서도 김일병의 이미지는 저를 포함한 다른 후임에게 있어서도 항상 친절한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분후 어딘가에서, 어렴풋한 외침이 계속해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하진 않았지만, 다급하다는 느낌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엔 그 외침이 김일병을 부르는 목소리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아, 그래도 어딘가에서 발견이 됐구나,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 추측은 반만 맞았습니다. 그 외침은 점점 가까워져오더니, 마침내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다가왔죠. 그 외침은 바로 "의무병!" 이었습니다.
의무병이었던 저와 제 분대원들은 그 한마디에 바로 뛰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의무병을 불렀던 그 상병의 넋나간 얼굴을 보니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뛰쳐나간곳은 병영 식당 뒤편에 마련된 예비군 훈련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선 이미 여러 간부들이 핸드폰 라이트의 조그마한 불빛 하나에 의존하여, 쓰러진 김 일병을 CPR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까이 갔을 때, 저는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바닥에 녹아내린듯 축 늘어져 있던 김일병과 김일병의 얼굴 주변을 흥건하게 적신 검붉은 색의 피, 그리고 사열대 처마에 대롱대롱 매달린 굵은 노래방 마이크 선까지. 그는 목을 매달았던 것입니다. 불과 몇일전까지만 해도, 병영 식당에서 저의 식판을 검사하며, "아주 깨끗이 닦았구만" 하며 만족해했던 그가, 지금은 그 두눈에 생명의 불씨를 찾아볼 수도 없는 공허한 시선을 뿌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함을 느꼈습니다.
이 사태를 목격한 최초 발견자들은 사열대 밑에 엎드려 울부짖고 있었고, 오늘 당직사관이셨던 행정보급관님은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이지, 엎드려 울부짖는 그들과 똑같이 정신이 붕괴된 상태였었습니다. 김일병에게 CPR을 하고 있던 중사는 의무병들이 온것을 보곤 당장 산소호흡기를 가져오라고 얘기했습니다.
다급하게 뛰쳐나간 저의 의식은 다른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완전히 마비 되어 있었습니다. 그저 목숨이 달려있다는 중압감이 저의 다리를 움직이며, 제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를 내게끔 저를 채찍질 했습니다. 제가 심장이 아플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소호흡기를 인계하자, 간부들은 수동 산소호흡기 엠부백을 김일병 입에 갖다대고 인공호흡을 시도했습니다.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을 번갈아하며, 한껏 지친 중사는 제게 심폐소생술을 넘겼고 저는 김일병의 흉부에 손을 댄채로 흉부압박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손을 댔을 땐 이미 김일병의 신체는 생명이 빠져나간듯 차가웠지만 지금 모인 이 모든이들이 죽은 시체에다 대고 무의미한 짓을 했다는 섬뜩한 진실에서 눈돌리기 위해, 저는 더욱 격하게 하나! 둘! 하며 심폐소생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흉부압박 사이클을 몇 번 돌리기도 전에, 부대 앰뷸런스가 와서 그를 실어가면서. 그는 제 손을 떠나갔습니다.
김일병이 떠나간 그 자리를 잠식하는 건 불편한 고요였습니다. 차라리 울부짖음과 외침이 오고가는 그 소란함 속에는 그를 살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깃들어 있었지만, 이 고요는 이른 애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만 같아서 참을 수 없이 불편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간부는 최초 목격자를 제외한 다른 병사들과 의무병들은 생활관으로 돌아가라더군요, 할일을 다 했으니 이제 잠이나 자라는 의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생사가 넘나드는 격렬한 현장을 지나고 불편한 고요가 감도는 생활관 천장을 바라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했습니다.
제가 생활관으로 돌아갔을 때, 당연하게도 동기들은 아무도 자고 있지 않았습니다. 동기중 한명이 벌떡 일어나, 제게 괜찮아? 라고 물었지만, 거기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수 없으니, 하늘에 맡기자" "우리 모두 노력했으니, 분명 회복하실거야" 같은 뜬구름 잡는 말을 했어야 했을까요? 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꾸물거리는 어둠이 형상을 갖추어 제게 가위눌린 듯한 마비를 선사하는 악몽을 꾸었습니다.
사망 이후
김일병이 소대내에서 후임에게도 무시받는 만만한 선임이었다는 것, 경계 근무 시간에 늦어서 같이 근무하던 선임에게 근무 시간 내내 털렸다는 것,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분대장에게 얼차려를 받았다는 것, 생활관 동기들과 다툼이 있었다는 것, 한 성질 더러운 상병에게 심각한 폭언 욕설을 들었다는 것, 궁지에 몰린 김일병이 상병에게 상담을 했을 때 '너만 힘든거 아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었다는 것들은, 전부 그가 사망선고를 받은 이후에 제가 알게 됐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이 이야기들이 김일병의 죽음에 대한 전말을 밝히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김일병은 죽기전에 자신의 일기와 노트를 전부 소각장에 불살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기 전 유서를 남겼지만 그곳엔 누군가를 지목하기 보단, 자신을 벌레같다고 자책한 글자와 어머니에 대한 사과만이 적혀있었습니다그가 이 사태와 관련된 인물의 이름 몇자만 남기고 갔어도 그를 이런 궁지에 몰게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죽을때까지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떠날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김일병이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오자, 부대엔 일과가 멈추고 사복을 입은 헌병대가 오고가기 시작했고, 저는 현장에 있었던 의무병으로써 다른 인원들보단 훨씬 더 많이 헌병대들과 접촉했어야 했습니다. 그날 밤 있었던 일은 제게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헌병대가 현장 검증을 위해 저희를 다시 그 자리로 데리고 갔던 건 그날 밤을 연상케해서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괴로웠던건, 우리부대에 온 김일병의 어머니가 현장에서 김일병을 심폐소생할 때 도움을 주었던 병사들을 향해 울면서 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래도 다들 고마워요. 우리 아들 살리려고 애써줘서."
3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이 말을 떠올리면 슬픔이 북받쳐오르는 걸 느낍니다.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
어느 한날은 간부 한명이 제게 병영 생활 상담관님이 오셨으니, 그분과 상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그 날 이후로 저는 부대가 제게 보여주는 초조한 관심들이 전부 불편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진심어린 걱정보단 김일병의 연쇄작용을 두려워하는 느낌으로 저를 또 하나의 폭탄처럼 대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죠. 저는 김일병 어머니의 그 한마디를 들은 이후로, 남은 군생활을 도망치치 않고 다 마치겠다고 다짐한상태였기 때문에 병영상담관에게 가서 더 이상 저를 케어하지 않으셔도 된다, 라고 말할 작정이었습니다.
병영 생활 상담관님은, 나이 지긋하신 여성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저는 제가 생각한 바를 말하려 했으나, 그분이 제게 던진 첫 질문은 좀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김일병은 어떤 친구였어?"
저는 그 질문에 조금 당황했습니다, 솔직히 그분이 제게 기분이 어떠냐, 악몽을 꾸느냐, 환각이 보이느냐, 혹시 집에 가고 싶으냐, 따위의 질문을 할줄 알았기 때문이었죠. 일단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김일병에 대해서 대답했습니다. 소대내에선 무시받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내 동기들은 좋아했다. 그는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줬고 우리는 그런 그의 친절함을 좋아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대답을 들은 상담관님의 대답 역시 제가 예상하지 못한것이었습니다.
"고마워"
도대체 뭐가 고마웠다는 걸까요. 저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상담관님은 본인과 김일병의 이야기에 대해서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김일병은 자기 소대의 엄격한 분위기와, 부대내의 위계질서 같은 것들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고 그 죄책감 때문에 상담관님과 자주 상담했었습니다. 김일병과 친분을 쌓으며 그가 계속 힘들어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상담관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무 힘들면 집에 갈래? 내가 보내줄 수 있어."
하지만 김일병은 두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뇨, 저 여기서 계속 생활할래요, 조금 힘들지만 여기는 밥하고 옷도 잘주고,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김일병은 군생활에 의지를 내비치곤 이렇게 첨언했습니다.
"그리고 상담관님 더 이상 안찾아오셔도 돼요, 자꾸 상담하는 모습 보이면, 부대 사람들한테 폐급 처럼 보일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그게 상담관님이 보는 김일병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상담관님은 잠시간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던 김일병에게 가족애 같은 것을 느꼈고. 어떻게든 그를 도와주려 했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좋게 기억하고 있던 저에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울었습니다. 김일병이 너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저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일병에게 폭언했던 사람들, 김일병에게 모욕을 안겨주고 벌레같다고 느끼게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인마라고. 저는 이렇게 말하며, 김일병에 죽음과 관련된 이들이 벌을 받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담 이후엔 헌병대나 부대내의 조사에서, 김일병과 관련된 이들의 이름과, 그들이 김일병에게 했던 일들을 적나라하게 적었습니다.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더라도 언급이 될 거라는 제 바람과는 달리, 일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휴가
김일병의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과 김일병의 죽음에 연관된 모든 이들은 전부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며 휴가를 나가거나 의가사 제대를 했습니다. 근무 시간에 늦어 김일병을 근무 내내 갈구었다는 선임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김일병에게 얼차려를 주었던 분대장, 상담을 요청했을 때 거부한 선임과 김일병에게 폭언 욕설을 했던 선임까지 모두 14박15일(만박)휴가를 나갔다는 응보를 원하고 있던 제게 있어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폭언 욕설을 했다던 그 선임은 나중에 추가로 29박30일 휴가까지 나갔다더군요, 저도 이게 가능한지 그때 처음 알았었습니다. 병가와 관련된 것들은 저렇게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다 못해, 김일병의 죽음과 연관이 없고 현장에 없었던 사람까지 휴가를 받거나 의가사 제대를 하곤 했습니다. 군부대는 이런 정신적인 피해를 적극적으로 어필하기만 한다면 자판기에서 음료 나오듯 휴가가 나오나 봅니다. 이런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저는 성선설에 강력한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의문들은 제 속에서 해소되지도 못한 채, 쌓여만 갔습니다. 군대에서 너무 열심히 할 필요없다라는 이야기가 이런건 아니었을텐데 말이죠.
섬뜩한 진실
이 일 이후로 떠난 병사들의 빈자리와는 무관하게 저희 부대는 김일병의 사망을 짊어진 채로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로운 동기와 후임들이 하나둘씩 제 밑을 채워가면서 인명사고로 인해 생긴 충격이 메워지자. 어느새 저는 '그런 일이 있었다'하며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만큼 무뎌져 있었습니다. 저는 문득 느꼈습니다. 김일병의 죽음은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구나. 하고 말이죠. 해소될 길 없어보이던 그 착잡함과 김일병을 향한 안타까움은, 상처는 물론이고 경각심마저 아물게 하는 인간의 비정상적인 회복력에 의해 모두 잊혀지고 만 것입니다. 하물며 그의 이야기와 사정을 알고, 그 차가운 흉부에 손을 대었던 저 역시 그랬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요, 저와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군부대마저 김일병의 죽음을 잊은 듯 했습니다.
이 때 저는 망각이 주는 회복력에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