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스트레스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간헐적인 두통부터 시작해서, 불면증이나 피로와 같은 여러 만성적인 불편함의 원인도 되며 심지어는 끔찍한 탈모까지 불러오는 등, 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한 마디로 특정할 수도 없는 이 스트레스라는 것이 사람을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갉아먹어 생명력까지 소모시킨다는 건 경험으로, 혹은 전해 들은 이야기들로 아주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여러분께 소개해드릴 게임은 이 스트레스라는 요소가 게임에 아주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게임 다키스트 던전은 레드 훅 스튜디오에서 개발하여 2016년 1월 19일에 발매된, 턴제 RPG 게임입니다. 주인공은 모종의 이유로 자살한 선조의 편지를 받고 몰락한 가문을 다시 세우기 위해, 여러 용병들을 고용하여 영지에 도사린 여러 도적들과 괴물들을 청소하며 무너진 영지를 다시 가꾸어 가는 게임이죠.
여기서 게임의 전반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던전 탐험입니다. 주인공은 가주가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뼈들이 되살아나 산 자들을 공격하는 '폐허'와,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연을 모독하는 기괴한 돼지 괴물들이 도사리는 지하 통로인 '사육장'과, 해안 교역상을 공격하는 심해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안만'과, 강도들과 마녀 그리고 포자 괴물들이 위협하는 '삼림지대'와 같은 4개의 던전들을 모두 깨끗이 정화해야 합니다.
다키스트 던전의 전투 장면, 캐릭터마다 '속도'가 가장 빠른 순으로 차례를 잡아 공격을 주고받는다.
각 지역을 탐험하다 보면 하나같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기괴하고 끔찍하게 생긴 괴물들이 본인들의 생김새에 걸맞은 무시무시한 공격들을 용병들에게 가하지만,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용병들은 적들의 공격으로 인한 대미지 외에 스트레스 대미지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스트레스 수치
이 게임에는 체력바 밑에 검은색 칸으로 이루어진 스트레스 수치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탐험을 계속하면 조금씩 고갈되어가는 체력과는 별개로 스트레스 수치는 탐험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쌓여만 갑니다. 체력 수치는 오로지 물리적인 피해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반면, 스트레스 수치는 정말 다양한 이유로 쌓일 수 있다는 점도 스트레스 수치만의 특징입니다. 적의 강력한 공격을 맞았을 때에도, 바보같이 함정을 못 보고 밟아버렸을 때에도, 아군이 적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맞아버렸을 때에도, 장애물을 삽 없이 손으로 치워야 할 때에도, 굶주린 와중에 먹을 식량이 없을 때에도, 심지어는 그냥 걷고 있는 와중(!)에도 스트레스 수치는 계속해서 쌓여갑니다.
하지만 게임 초기에는 이 스트레스 수치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뭐, 조금 많이 쌓이는 것 같긴 해도,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당장 용병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게다가 적들이 스트레스에 대미지를 주는 공격을 할 때는 오히려 체력에는 별 대미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체력이 적은 용병이 스트레스 공격을 받을 때면 오히려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심코 지나친 스트레스 수치가 조금씩 쌓이고, 그렇게 쌓아온 스트레스 수치가 마침내 100이 되었을 때, 이 게임은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정신 붕괴
스트레스 수치 100에 다다른 영웅의 모습. 이때부터 용병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시작한다.
어디 갔는가? 영웅심이여? -게임 내 내레이션 중-
용병들의 스트레스 수치가 100이 되면 '영웅이 의지가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는 메시지가 나오면서 위의 그림과 함께 붕괴 상태에 돌입합니다. 붕괴 상태에 돌입한 용병들은 기본적으로 매우 약해지는 데다, 말 그대로 정신이 무너져내려 비정상적인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합니다. 지정해준 공격 대상을 자기 맘대로 바꾸는 건 예삿일이고, 심한 경우는 공격을 아예 거부하거나 아니면 공포에 질려 헛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제멋대로 소중한 턴을 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의광기를 아군에게도 퍼트린다는 점입니다. 붕괴 상태에 빠진 용병은 "우린 다 죽을 거야! 망했어!" 같은 말들을 하며 아군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아군의 성공적인 타격을 옆에서 훈수하고 깎아내리면서 자극하는 데다, 길을 걸어갈 때마다 자신들의 멸망을 예언하는 등의 소위 '분탕질'을 놓으며 아군의 스트레스를 높은 폭으로 높이는 내부의 적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내부의 적이 있으면 다른 아군조차 붕괴 상태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인 것이죠.
즉, 붕괴 상태에 빠지면 정상적인 진행은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없어서 무심코 쌓인 스트레스가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 거죠.
이때부터 스트레스에 피해를 주는 적들의 공격들은 다른 어떤 공격보다 가장 무시무시하고 두려운 공격으로 보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스트레스 수치를 쌓지 않기 위해 스트레스를 주는 적을 1순위로 집중 타격하여 제거해보지만, 던전 탐험 중에 어쩔 수 없이 쌓이는 스트레스들은 용병들의 내부에 계속해서 축적되어가며 끝내 붕괴 상태에 빠져들게 하고, 제작진들은 그런 여러분들을 조롱하듯 아주 다양한 붕괴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편집증
편집증에 빠져든 용병은 극한의 공포로 인해 이젠 자기 뒤를 지켜주는 아군마저 의심하며 그들이 주는 치유나 버프(이로운 효과)마저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체력도 얼마 없어서 죽기 직전인데 '네 진의가 의심스럽다' 하며 치유를 거부하는 꼴을 보자면 분노가 치솟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기적
죽음이 눈앞인데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지, 배려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기심에 빠져든 용병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기 시작하며 전투에서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격렬한 전투 중에 갑자기 쉬겠다고 하질 않나, 전리품을 챙기는 중에 전리품을 모조리 훔쳐가질 않나. 이런 모습을 보자면 현실에서 이기적인 사람을 봤을 때 느끼는 아니꼬움이 여기서도 느껴지게 됩니다.
비이성적
정신이 궁지에 몰린 나머지, 완전히 미쳐버린 용병들은 비이성적에 빠져들며 한마디로 맛이 가버립니다. 전투 중에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거나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며 아군들의 분노를 배가시키곤 하지만. 너무 제정신이 아닌 나머지, 무슨 해로운 행동을 할지 도통 종 잡을 수가 없어서 더욱 위험한 붕괴 상태입니다.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빠져든 용병들은 적들의 공격을 극히 두려워하게 되어, 아군들의 등 뒤로 슬금슬금 내빼기 시작합니다. 든든하게 전열을 지켜야 할 전사들이 이 붕괴에 빠지게 되면 계속해서 후열로 도망을 가면서 공격도 못 받아주고 공격을 하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어, 여러분이 짜 놓은 전략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폭력적
스트레스 상황에서 흔히 보이는 행동이 '짜증'이듯이 정신이 무너진 용병들이 보이는 행동이 폭력적인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위가 너무 높아진 나머지, 폭력적에 빠져든 용병들은 심각한 수준의 폭언을 아군에게 쏟아부으면서 그들의 스트레스 수치를 자주, 높은 폭으로 올리면서, 심지어는 아군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폭력적에 빠져든 용병이 실수로 체력이 적은 아군을 죽여버렸다고요? 아이고 저런.
피학적
잦은 고통에 노출된 용병들이 끝내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고, 고통을 즐거이 받아들이려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져든 상태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공격을 피할 의지도 죽지 않으려는 의지도 없어서 적들에게 자신을 공격하라고 도발하거나, 심할 때는 자해를 하며, 안 그래도 낮은 생존확률을 밑바닥으로 낮추곤 합니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더라고요
이번 전투에서 스트레스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용병이 끝내 사망해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죠 뭐, 다음엔 좀 더 잘해보리라 하며 영지로 돌아온 순간, 죽은 용병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 어디 갔지? 하며, 부활 기능이 있나, 하며 영지를 살피는 여러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사실. 이 게임엔 부활 기능 같은 건 없습니다. 죽은 용병은 영구적으로 사라지며 돌아오지 않습니다. 레벨도 높고 좋은 장비를 끼워줘서 아끼던 용병이었다고요? 아이고 저런.
이렇게 영구적인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이 게임을 대하는 유저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조금 어려운 게임에서, 매 순간의 선택마다 긴장감이 넘치는 하드코어 한 게임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의 실수는 곧 용병과의 유언이 됩니다.
영웅의 기상
스트레스 관리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용병의 스트레스가 100이 되어버렸습니다. 아 이번 원정도 망했구나(-_-)하며 체념을 할 찰나에 모니터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위기의 순간, 절망을 딛고 각성한다
많은 이들이 혼돈을 마주하고 무너지지만 이 자는 아니다.. 오늘만큼은. -게임 내 내레이션 중-
스트레스가 100인 상태에서 용병들은 25% 확률로 붕괴 상태에 빠져드는 대신 영웅의 기상이라는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영웅의 기상 상태에선 붕괴 상태와는 정반대로 수시로 열정적인 연설로 아군들에게 버프를 주고 다친 용병들을 치유를 해주며 따뜻한 말로 아군들의 스트레스 수치까지 낮춰주는 등 뭐하나 빠짐없이 이로운 행동들을 부족함 없이 해대기 시작합니다. 붕괴 상태 때문에 멀쩡했던 원정도 여러 번 말아먹은 유저들이 또 궁지에 몰려 포기했을 때, 화사한 효과와 함께 멋진 연설로 전투를 이끄는 영웅의 기상을 보면 그야말로 폭풍간지를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한번 영웅이 두 번 영웅이 되지는 않기 때문에, 저번 전투에서 영웅의 기상을 보여준 용병이 다음 전투에선 붕괴에 빠져 어버버 대는, 확 깨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영웅의 기상이 보여주는 기백은 기억에 오래 남아, 용병이 의지력을 시험받을 때, 제발.. 제발..! 하며 손꼽아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혹시 이 게임의 설명을 보면서 어떤 기시감을 느끼시진 않으셨나요? 저는 이 게임에서 스트레스와 관련된 요소들을 볼 때 참 우리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도 이 게임처럼 장소와 상황을 불문하고 무수히 많은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은 이 4글자 단어에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은 외면한 채 현실에 몰두하곤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스트레스를 쌓아가다 마침내 100이라는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바닥 없는 절망에 빠져들고, 기약 없는 미래에 두려워하며, 처참한 현실을 자학하곤 합니다. 고갈된 정신을 달래기 위해 위로와 힐링을 갈망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정신적인 갈증은 최소한조차 채워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붕괴 상태에 빠져 우울감에 찌든 나날을 보낼 때, 그냥 어쩌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기분이 좀 나아졌습니다. 무심코 유튜브에서 드래그한 무한도전 편집본이 너무 웃겨서 갑자기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우연히 들은 잔잔한 노래에 말 못 할 위로를 얻고 눈물을 몇 방울 떨구니, 깊은 우울감이 씻겨 내려간 것 같습니다. 시간조차 해결하지 못할 것 같던 깊은 좌절은 그냥이라는 말보다 우스울 정도의 사소한 이유로 해소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론 "뭐 어때"라는 말로 마냥 불길하기만 했던 미래를 기대할 만한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고통에 허우적 대던 용병들이 위기의 순간에 영웅의 기상을 뽐낸 것처럼요.
이 게임이 인기를 끌었던 요소는, 분명 흔들림 없이 안전하던 여정이 적들의 치명타 몇 번에 휘청거리고 영웅들은 붕괴에 빠져 "우린 다 죽었어 징징"하며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웃픈 상황을 연출하면서도 누가 봐도 망삘이 보이는 전투에서 영웅의 기상을 발휘하며 대역전을 이루어내는, 우리 삶처럼 굴곡진 연출을 보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스릴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해에 달라진 숫자들이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삶의 현장을 극적으로 바꿔주진 않을 것이지만, 변함없는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영웅의 기상을 발휘할 여러분들의 튼튼한 멘털의 존경을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