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치즈와케이크 Aug 05. 2022

인간 관계, 최소 투자 최대 효율

가성비 챙기는 인간 관계

 이 세상은 투자대비 결과가 1:1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불공평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인간 관계의 불공평은 정점에 달해있다. 가히 가상화폐 등락폭처럼 투자 대비 결과가 기형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지금껏 어떤 인간관계를 해왔던가? 가까운 사람에겐 정성을 아끼지 않고, 상대가 잊을만 하면 안부를 전하며, 상대의 생일과 경조사를 챙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당신의 정성은 금방 잊어먹고, 당신이 연락하기 전까진 죽은 사람처럼 있다가, 당신의 연락엔 그저 '바빴다'라는 말로만 일관하면서, 경조사에는 묵묵부답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분명 밥 먹을 때, 화장실 갈 때, 잠에 들기 전에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핸드폰이었을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연락에 바빴다라는 대답을 했다. 이것은 당신의 연락을 받는 것보다, 무한도전 레전드 요약본을 보는 일이 더 중요했다는 뜻이다.


 또, 당신이 이런 결과에 상처 받았다는 말을 하면 제 3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그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분명 당신이 부담을 줬을 것이니,  상대를 이해하라느니, 자신을 사랑하느니, 하느니만 못한 말들로 당신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곤 했다.


 남들에게 부담을 줬다고? 그 말은 당신이 주는 정성은 그냥 부담이라고 말하는 일종의 무시나 다름없는 말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아끼는 이들과도 아무것도 주고 받지 않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당신에게 받을 거 다 받으면서도 보답하기 싫은 사람이 내놓는 변명일 뿐이다.


 상대를 이해하라고? 뭐 좋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왜 항상 이해나, 배려같은 헌신적인 단어의 주체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가?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이해와 배려라는 단어를 몰라서,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 없는 것인가?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럼 지인에게 정성을 쏟는 사람들은, 모두 의존증에 빠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챙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자신을 사랑할 줄 알기에, 남들에게도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것이다. 남들이 이야기 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조차 몰라서 '아하~! 나를 사랑해야하는 구나?!' 같은 말을 하는게 아니라.  그리고 애초에 이기적인 사람은 베푸는 행동 자체를 하질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 얼핏 보면 좋은 말 같지만, 사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 뒤에는, 대게 이런 말이 자주 붙기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했을 때, 남도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스스로를 사랑하라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지금 부족한 네 모습을 가만히 둘리가 없다.
->자기 개발(관리)해라.

대게 이런 흐름으로 가게 된다.


 자기 개발하라는 말 좋다,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빛나는 사람을 좋아할 테니까. 하지만 그럼 인간관계는 정성이라느니, 인간관계에 서열 같은 건 없다느니 하는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사랑하라는 서정적인 말을 해놓고, 지금 니 모습이 사랑받지 못할 상태라고 말하는 건 무슨 모순인가? 아니, 애초에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자신이 무시받는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댓가를 바라지 말라고? 그런 이야기는 주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받는 상대나 그걸 모르는 제 3자가 함부로 해도 되는 말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인간관계는 정성이라느니, 언젠간 상대도 알아준다느니 하는 말에 의문을 제기할 때가 왔다. 많이 주고 헌신해도 똑같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게 된 이상, 이젠 가성비 높은 인간관계를 함으로써 나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큰 의미없는 것을 주어라.

 자신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헌팅을 당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타인의 조공이 들어오는 엄청난 인싸가 아닌 이상에야, 아무런 교류없이 친분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남에게 줄때는 언제나 자신에겐 0에 가까운 것을 주어야 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것, 내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을 주어야 마음의 손해가 없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지만 상대는 초콜릿을 좋아하니, 억지로 먹거나 버리는 대신 상대에게 주는 것이고. 나는 귀찮아서 영화를 보러 갈 일이 전혀 없으니, 어디에서 받은 영화 티켓을 상대에게 주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

 생일이라고 머릿속으로 스토리 텔링까지 하며 몹시 정성들인 선물을 챙겨줬을 때, 상대의 반응이 시큰둥 하면 몹시 속상하겠지만, 내게 있으나마나한 것을 준다면 상대가 똑같은 반응을 보여도 내겐 타격이 없다. 어차피 내 손에 있어도 버렸을 테니까.

 즉 내가 100을 줄때 상대가 10을 주면 극심한 손해를 보지만, 내가 만약 0에 가까운 것을 준다면, 10이 와도 투자에 비해선 고수익을 보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주는 것을 포장해라

 내게 쓸모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내겐 쓸모가 없다라는 사실을 굳이 남들에게 강조해서, 내가 주는 것의 가치를 떨어뜨릴 필요는 없다. 가령 상대에게 초콜릿을 줄때는, 내가 초콜릿을 싫어해서 준다라는 말보다는 네가 중요한 사람이라서 이런 걸 준다, 라는 말로 한껏 포장을 시키는 게 좋다. 아래를 한번 보자.

"나 초콜릿 안 좋아하는데 그냥 너 먹어라."
"단거 먹으면 기분 좋아지니까, 이거 먹고 힘내라."

말의 어감이 확 다른 것이 느껴진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서도 점순이가 주인공에게 감자를 주면서도 굳이 "느그 집엔 이런거 없지?" 같은 말을 해서 주인공이 퉁명스럽게 반응한 것을 생각해보자. 아 물론, 본인이 츤데레 컨셉트를 노려서 일부러 그런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어차피 내겐 0에 해당하는 것이라도, 말만으로도 상대에겐 0 이상의 가치를 가지도록 포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인간관계가 이토록 괴롭고 가슴아픈 것은, 서로에게 변심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날따라 기분이 안좋아서, 그날따라 서운하게 느껴져서, 아니면 더 친한 사람이 생겨서, 애인이 생겨서, 같은 등등의 이유로 강한 결속력을 가진 관계도 금방 깨어지는 것이 인간관계의 현실이다.


 나는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니, 혼자서는 살수 없니, 같은 흔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사람과 사귀면서 상대의 마음을 얻는 행동이 얼마나 마음을 충만하게 만드는 일인지를 몸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관계의 반작용이 얼마나 강한지도 안다. 내가 들인 정성이 크면 클 수록, 내가 가졌던 애정이 크면 클 수록, 반작용은 눈덩이처럼 커지는데, 충격흡수는 그만큼 되지가 않는다. 더욱이 사람의 변심이 개입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고가 생길 수 있는 것이 인간관게이다.


 나는 그렇기에 여러분에게 사고를 대비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혹여 상대의 변심이 발동해서 당신을 부정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미리 마음속에 에어백을 설치해놓고 곳곳에 보험을 들어놓음으로써, 사고후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당신을 지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작가의 이전글 후회하는 당신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