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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양 Apr 23. 2022

자두 같은 아이

말괄량이는 왜 소심한 범생이가 되었나?



“너 같은 딸 키우려면

멘탈이 엄청 단단해야 할 거 같아.”



문득 지인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일상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곧잘 치고 번번이 다치기도 잘하는 내 모습에 우스갯소리 반, 진심 반을 섞어 던진 말이다. 살짝 뼈가 아려오긴 하지만 나 역시 인정하는 바이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자주 듣는 말이다. 실제로 부모님은 아주 많이 단련되신 상태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비단 사고뭉치 기질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의 모든 방면에 두루 적용되며 그 유래도 아주 깊은데, 오늘은 잠시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이전에 스스로를 소심쟁이였다고 정의 내려놓고 동시에 동네를 휘어잡던 골목대장이었다고 표현한 것에 의아함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오늘 궁금증이 좀 해결될 것이다.-


.

.



나는 어릴 때 좀 독특하고 이상한 아이였다.


만약 <안녕 자두야>란 애니메이션을 알고 있다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난 <안녕 자두야> 속 주인공인  맹랑한 자두와 꼭 닮은 성격의 아이였다.


애니메이션 <안녕 자두야> 中


입이 근질거렸는지 남들보다 일찍이 말을 습득해 종일 입놀림을 쉬지 않았고, 키 작고 앙상한 몸을 하고서 체력은 좋다 못해 넘쳤다. -산이나 물, 놀이터 모든 곳으로 쏘다녔다. 어느 정도냐 묻는다면 ‘산돌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나무를 타는가 하면 철봉, 정글짐, 구름사다리 위를 뛰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매번 넘어지고 깨져서 다리를 포함한 온몸은 언제나 상처 투성이었다. 행여 오해가 있을까 말해두지만, 이런 나는 서울 태생에 서울에서만 자란 서울 토박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같은 곳은 심심해서 못 견딜 수준이 된 7살 이전까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세상엔 재미난 것이 넘쳤으며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이미 바쁜데 유치원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세 살 즈음부터 넘치는 체력으로 동네 오빠들을 이끌고 온 동네를 누비는가 하면 모두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있는 시간엔 혼자 방에서 요란한 상황 설정과 함께 인형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사부작사부작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었다. 어쩌다 지루함이 느껴지면 등을 베고 누워 벽에 붙은 한글을 홀로 깨쳐야 했으니 도무지 쉴 새가 없었다. 동화 ‘피노키오’를 더듬더듬 발음하며 마침내 까막눈에서 벗어난 다섯 살 이후에는 읽을 책이 넘쳐서 더 그랬다.


바람에 자꾸만 닫히는 방문이 귓가를 거슬리게 하자, 방문 앞에 앉아 한참 방문을 노려본 적도 있다. 해결책을 내 고민하다 옆 서랍에서 굵은 고무줄을 꺼내 문고리와 서랍 손잡이를 ‘X(엑스)’자로 이어 결국 고정에 성공했는데, 이런 사소한 발견에 성공한 날은 스스로가 대견해 혼잣말로 칭찬을 가득 건네기도 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엄마는 늘 말했다.


“아가야, 뭐해? 오늘도 바빠? 오늘은 엄마랑 놀까?”


그럼 고작 네다섯 살 남짓의 난 늘 이렇게 답했다.


“엄마 나 바빠! 바쁘니까 말 시키면 안 돼!”


.

.



나는 자존심이 무척 세고

겁보다 오기가 강한 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겁을 하는 병원, 특히 치과에 가서도 항상 무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치료를 받았고, 이 부분만큼은 학생 때도 마찬가지여서 졸업식을 제외하고 학교에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거다. -축구부에서도 가장 실력이 좋다는 아이의 풀파워 공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도, 억울한 일로 선생님께 매를 맞고도, 고무줄놀이에 욕심내 무리하게 날아올랐다가 추락해 다리를 접질렸을 때도 결코 울지 않았다.-


네 살 때, 머리가 크게 찢어진 적이 있다. 강렬했던 날인 만큼 아직도 그 상황이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웬 자신감으로 일을 저지른 건지 지금도 실소가 난다.


사건의 발단은 아빠 친구분 가족과의 가족 간 교류 자리였다. 아빠 친구분 자제 중에서 나보다 한 살 어린 막내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동생을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던 내 입장에선 그 아이가 참 신기하고 귀여웠다. 무려 한 살이나 언니로서 위엄을 보여주고 싶었고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몸소 표현하고 싶었다. 하필 그 표현을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시도한 게 문제였지. 식당에 가기 위해 온 가족이 신호를 기다리던 때였다. 신호등 옆 우뚝 솟은 경계석 부근에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제안을 던졌다. “언니가 업어줄까?”라고. 아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난 그럼 돌(경계석) 위에 올라가서 내 등으로 올라타라고 말했다. 아이는 시키는 대로 경계석 위로 올라가 내 위로 몸을 던졌다. 당시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난 예나 지금이나 평균보다 몸집이 작고 어릴 적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그리고 내게 몸을 던진 그 아이는 세 살이었지만 나보다 키도, 덩치도 족히 한 뼘은 더 커다랬다. 그럼에도 나는 ‘난 언니니까!’라는 생각에 취해 무작정 무모한 짓을 행하고야 만 것이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처참했다. 그대로 고꾸라져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냅다 들이박고 피를 철철 흘리던 나는 기겁을 하는 엄마와 아빠의 손에 들려 근처 응급실로 이송됐다.


워낙 어린 아이라 수 바늘을 꿰매야 하는 수술임에도 전신마취를 할 수 없어 약한 부분마취만으로 머리를 꿰매던 와중이었으나 난 덤덤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의사 선생님, 멀리서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모은 채 수술을 지켜보는 부모님 등을 멀뚱히 눈으로 훑으며 수술시간을 견뎠다. 수많은 보는 눈이 있는 바깥에서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여겼고, 게다가 난 무려 네 살인 언니였으니까. 그런 생각 때문인지 그리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만 속이 탔을 뿐. 수술을 마치고 온 네 살 아이는 되려 무심한 표정으로 ‘괜찮다’며 부모님을 위로했다.


그만큼 난 폼과 위세에 죽고 사는 아이였다.


.

.



이런 내가 소심쟁이 모범생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학교라는 공동체 생활 이후였다. 수많은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이라는 많은 어른들까지 존재하는 작은 사회 속에 놓이면서 본능적으로 눈치가 발동하기 시작했고, 사소하지만 오래 남을 스크래치들도 간혹 받다 보니 과거에 비해선 매사 조심스러워진 것이다.-이전엔 거의 모든 것에서 제약이 없는 상태로 자랐다.-


(그래도 본성은 죽일 수 없는지 겉으로는 다소곳하고 얌전한 학생인 체했지만 이따금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모습들은 어쩔 수 없었다. 이를테면 점심시간마다 축구하러 뛰쳐나간다거나 귀찮게 구는 남자애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일 등등..)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처럼) 학교 이전에 선행적으로 사회를 학습할 수 있는 곳에 오래 몸을 담았다면 상대적으로 ‘사람과의 관계’로 받는 스트레스가 덜했을까? 란 생각도 들지만 이미 지난 일을 뭐 어쩌겠나. 무엇보다 유년기의 나는 자유로웠고 나의 기준으로 누구보다 행복했으니 후회하진 않는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놀이터로 달려가 매일 5시간씩 일명 ‘지옥 탈출’ 게임을 즐기고, 각종 노래방과 분식집 단골 자리를 꿰차고 있었으니 학창 시절이라고 마냥 차분한 학생이었다고 절대 말할 수 없기도 하다.-


학창 시절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부분이며 많이 행복했고 그 시절을 사랑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학교’라는 집단은 ‘개인’의 개성이 억눌리고 검열되는 시초가 아닐까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화되는 과정 속에서 겪어야 할, 어쩌면 필연적인 관문임을 알면서도 씁쓸함이 남는 건 과거의 나에 대한 약간의 그리움 때문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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