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노필터링 주선자
나는 소개팅 경험이 꽤 많은 편이다.
이 경험들을 진작에 책으로 썼다면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많았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내가 솔로일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소개팅을 많이 주선해 준다.
좋은 시절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아 안타까워서 그런 것인지,
잘 쌓아온 평판 덕분에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져서 그런 것인지,
정말 나랑 결이 잘 맞는 상대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어찌 됐건 본인의 지인이나 지인의 지인을 소개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새로운 인연의 기회를 주는 셈이니,
늘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소개팅에 임한다.
그렇다. 느껴지는가.
나는 프로 소개팅러다.
이번에 소개할 Top 2는 소개팅남들과의 에피소드 이면에,
사실상 소개팅을 주선해 준 주선자에게 전하는 편지다.
한 번은 아는 오빠가 친구 사진을 보여주며 소개팅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특별한 소개 멘트도 없고 사진도 흐릿해서 외모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힘들었지만
편하게 한번 만나 보라는 몇 차례의 권유에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소개팅하는 내내 찝찝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선자가 나와 그래도 꽤 긴 시간을 알고 지내 온 사람이고
평소에 내가 이성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성향들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냥 소개팅을 위한 소개팅 주선인 것 같다는 의심이 자꾸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다.
“제가 사실 OO한테 계속 졸랐거든요. 소개팅 시켜달라고. 근데 또 얘가 저한테 빚진 게 있기도 해서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결국 이렇게 해주기는 하네요. 하하”
오 마이 가쉬!
그래, 나를 소개팅 건수에 이용한 듯한 느낌.
예상대로 적중했다.
또 한 번은 직장 동료가 사촌형의 친구 사진을 보여주며 소개팅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역시나 특별한 소개 멘트도 없고 사진 속 인물에서는 그 어떤 끌림이나 호기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니,
“아니, 그냥 편하게 한번 만나 봐.” 라는 주선자의 단골 멘트가 어김없이 또 들려왔다.
싸하다.
그래도 인연이라는 건 혹시 모를 일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더 나았을까.
그렇게 나는 역대급 짧은 소개팅 시간 기록을 세우고 돌아왔다.
용모나 말투 등 첫인상부터 단정하지 못했고
취미나 일상 얘기는 온통 게임뿐인 게임 중독자였다.
서로를 알아가는 소개팅다운 대화는 전혀 불가능했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 시간조차 너무나 아까웠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얼른 반 이상 마셔버리고
프로 소개팅러로서 매너상 절대 하지 않는 멘트를 내뱉어 버렸다.
“죄송한데 제가 바로 뒤에 약속이 있어서요.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선자에게 전화해 소개팅 진행 상황을 알렸다.
무엇보다 왜 이런 사람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냐며 불쾌감을 드러내자,
“근데 네가 편하게 한번 만나보겠다고 했잖아.”
아… 내가?
어쨌든 소개팅 수락은 내가 했으니 내 책임이구나. 그렇구나.
주선자에게
좋은 마음으로 외로운 청춘남녀들을 위해 소개팅을 주선해 준 점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만난 적도 있으니까요.
다만, 가끔 본인들의 인맥 관리를 위한 소개팅처럼 느껴져서 불쾌했던 적이 있었어요.
혹시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순수한 기대감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는 말아 주세요.
주선자님들의 안목을 믿습니다.
그럼, 다음 소개팅도 잘 부탁드려요.
대망의 Top 1 기대하시라.
Stay tu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