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읽고 생각하기
최근에 읽고 있던 톨스토이의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라는 책의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종교의 의미와 본질을 생각하기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당, 사찰, 사원의 이미지를 대입해서 읽는 것도 좋겠습니다. 찬찬히 글을 읽은 후, 교회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해서도 논의하면 좋겠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새로운 인생관을 발견하기 위하여 인류가 반드시 따라가며 움직여야 하는 생활의 길을 예견하고 지시하는 사람들의 능력에 있다. 그 결과 인류 전체의 미래 행위가 변화되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과 달라지는 것이다. (…)
그러한 인생관에 대하여 우리는 세 가지를 알고 있다. 그중 두 가지는 인류가 이미 체험했고, 세 번째는 지금 우리가 기독교를 통해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세 가지 인생관이란 여러 가지 인생관을 우리가 임의적으로 모아 각각의 표제 아래 정리한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의 행동이 언제나 이 세 가지 인생관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즉, 이 세 가지 말고는 다른 생활을 볼 수 없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적인 또는 동물적인 인생관이다.
둘째, 사회적인 또는 이교도적인 인생관이다.
셋째, 전 세계적인 또는 신적인(또는 영성적인) 인생관이다.
첫 번째 인생관에 의하면 사람의 생활은 개인에게 달려 있고, 생활의 목적은 개인의 의지를 만족시키는 점에 있다.
두 번째 인생관에 의하면 사람의 생활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집합체인 종족, 가족, 씨족, 민족, 국가와 같은 사회나 계급으로까지 확대되고, 생활의 목적은 각 집합체의 의지를 만족시키는 것에 있다.
세 번째 인생관에 의하면 사람의 생활은 개인이나 사회나 계급이 아니라, 생활의 원리 및 근원, 즉 신을 따르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인생관은 이제까지 존재했거나 현재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토대를 이룬다.
첫째, 야만인은 오로지 자신의 생활과 개인적 욕망만을 인식한다. 생활에 대한 그의 관심은 늘 자신한테만 집중된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행복이란 자신의 욕망을 가장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데 있고, 생활의 동기가 되어주는 힘은 개인적인 즐거움에 있다. 또한 그의 종교는 자신의 신을 숭배하며 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이들은 그 신을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이루어주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상상한다.
둘째, 문명화된 이교도는 생활을 자신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집합체, 즉 부족, 씨족, 가족, 나라 안에서 인식한다. 그리고 이런 집합체를 위해 그는 그의 개인적 행복을 희생한다. 그에게 생활의 동기로 작용하는 힘은 오로지 명예다. 그의 종교는 그와 동맹을 맺은 자들, 즉 그 집합체의 시조, 선조, 그의 통치자들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며, 그의 씨족, 그의 가족, 그의 민족, 그의 국가의 배타적인 보호자인 신을 숭배하는 데 있다.
셋째, 신적인(또는 영성적인) 인생관은 갖는 사람은 자기 개인이나,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회(가족, 씨족, 민족, 부족, 또는 국가)가 아니라 영원하며 죽지 않는 생활의 근원에서, 즉 신에서 생활을 인식한다. 그리고 신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그는 개인적, 가족적, 사회적 행복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생활의 동력은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그의 종교는 행위와 진리에 의해 만물의 근원으로 인정된 신에 대한 숭배이다.
인류 전체의 역사적 생활이란 개인적-동물적 인생관으로부터 사회적 인생관으로, 그리고 사회적 인생관에서 신적 인생관으로 점차 나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수천 년을 지속하다가 고대 로마의 역사와 함께 끝나버린 옛날 인민 전체의 역사는 개인적-동물적 인생관이 사회적 인생관으로 변한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로마 제국과 기독교 출현 이후의 모든 역사는 지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서 사회적 인생관이 신적 인생관으로 변하고 있는 역사이다. 이 마지막 인생관과 그것에 근거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리의 생활 전체를 이끌어가기 위한 안내자이자 실제적이고 이론적으로 우리의 모든 행위의 근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소위 과학이라 잘못 일컬어지는 것을 믿는 사이비 과학자들은 오로지 그 외면적인 것만을 보면서 이를 시대에 뒤떨어지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오로지 교리적인 측면, 즉, 삼위일체, 대속, 기적, 교회, 성례식 등등으로 축소하여 이를 인류 역사상 존재해 온 무수히 많은 종교 중의 하나일 뿐이라 폄훼한다. 그러면서 이 종교 역시 인류 역사에서 역할을 다했고, 그 자신의 시대를 넘어 학문과 진리를 아우르는 계몽의 빛 앞에서 사라져 갈 뿐이라 주장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그렇듯이, 인류가 어떤 식으로 가장 조잡한 오류를 범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즉 이해의 수준이 저급한 자들이 높은 수준의 질서 있는 현상과 접촉할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주제를 이해하고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대상 관찰의 관점까지 자신을 끌어올리는 대신, 그것을 낮은 관점에서 판단하고 자신들이 토론하는 바에 대해 잘 모르면 모를수록 더 강력하게 확신하면서 일말의 주저도 없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보여준 생활상의 도덕적 가르침을 사회적 인생관의 낮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대부분의 학자들에게는 이 가르침 역시 인도의 금욕주의나 고대 스토아 철학 및 신플라톤주의 철학처럼, 그리고 비현실적이며 반사회적인 환상의 불확실하고 조리 없는 결합처럼, 그리고 우리 시대에 아무런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가르침의 전체 의미가 오로지 외부적인 현상, 즉 가톨릭, 신교, 특정한 교파 또는 속세의 권력과의 갈등에만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의존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짐작하는 것은 장님이 음악가의 움직임을 짐작하면서 음악의 성격과 질을 판단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 결과 콩트, 슈트라우스, 스펜서, 르낭에 이르는 모든 학자들은 그리스도 가르침의 의미와 목적, 이유 등을 깨닫지 못한다. 나아가 어떤 종류의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의 의미도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가르침의 의미에 깊이 들어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기분에 따라 달라지고, 특히 기분이 나쁜 경우 가르침의 어떠한 타당함도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그 가르침을 너그럽게 보아주고 싶을 때에는, 우월한 위치에 서서, 그리스도가 정확하게 그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는 뜻이었다는 가정 아래, 정중한 척하면서 그것을 교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코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자신만만한 사람이 자신의 하수로 여기는 인민에게 말하듯이 행동하면서, 가끔 그들 동료의 말도 덧붙인다. “그렇다. 당신은 이러저러한 것을 말하려고 한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교정의 방식은 실로 자신이 언제나 상대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신적인(또는 영성적인) 인생관의 가르침을 더 낮은 사회적 인생관의 수준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흔한 방법이다.
그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은 매우 훌륭하지만 너무 과장되었다. 이것을 완전하게 훌륭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우리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우리의 생활 방식에 의미가 없으며 불필요한 것들을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 톨스토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