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들도 울었다

고통의 무게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

by 후추
히브리서 5:5-10, 새번역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극소수로 고통과 죽음 앞에 의연하게 맞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종종 영화에서 묘사하는 영웅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영웅의 탈인간적 면모에 동경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만큼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이들과 달리, 죽음을 불사한 이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추앙받기도 합니다.

4481627458_2f7277da09_b.jpg This 17th-century stained glass roundel is in the church of Preston on Stour by flickr

그런데 특이하게도, 성서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이 공포에 질려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마가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 달라”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다소 모양새 빠진 모습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상당히 어색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체면 따위 없는 초라한 모습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만큼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이 심각한 문제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었던 예수님에게도 고통과 죽음은 외면하고 싶은 문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 실존에 주어진 무거운 고통의 무게를 마냥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눈물로 탄원하신 예수님을 흉볼 것이 아니라, 그만큼 죽음과 고통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고통과 죽음은 결코 가볍게 다뤄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가볍게 다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정당하다고 옹호합니다. 지구 반대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폭력을 용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정 이념과 가치에 경도되어 이 문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재밌는 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원과 간구를 들어주셨는데, 그 탄원과 간구가 예상과 다르다는 겁니다. 7절과 8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고통과 죽음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순종을 배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동문서답과 같은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되새겨 볼 말씀입니다. 기도의 결과,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배울 점은, 상황을 뒤바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기도자의 뜻을 관철시키는 간구가 아니라, 기도자의 순종으로 귀결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뜻 모를 고통과 죽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정당한 전쟁, 정의로운 폭력은 관념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전쟁은 평범한 민간인을 학살하고, 위기 상황에 대처가 어려운 여성과 어린아이를 주된 희생자로 만듭니다. 또한 직접 고난받는 종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신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 다른 장에서 말하기를,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교회가 겪는 수난과 고통을 감내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지 않기에 다르겠지만, 수난받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끌어안는 것으로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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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을 혼자서 짐져야 한다는 외로움 때문입니다.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인칭의 고독이 고통의 본질입니다. 여럿이 겪는 고통은 훨씬 가볍고, 여럿이 맞는 벌은 놀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견디는 방법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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