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다마스쿠스는 어디인가?

바울에게서 배우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

by 후추
[사도행전 9장, 새번역]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7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12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18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20 그런 다음에 그는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
peter-paul-rubens-1577-1640-conversion-of-saint-paul-p1978pg357-courtauld-gallery-468e35-1024.jpg Peter Paul Rubens, "Conversion of Saint Paul"


회심 이전,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기도 했습니다. 청년 바울은 공권력을 행사할 권한이 없었지만, 대제사장을 후견인으로 삼아 자경단 활동을 했습니다. 바리새파 출신의 청년 유대인으로 그는 열성적인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시쳇말로 애국청년, 애국보수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폭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교도 예수쟁이들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려던 모습에서는 그의 편협한 열정이 느껴집니다.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그가 환상을 경험한 이후, 완전히 달라진 인식을 보입니다.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었고, 사흘 동안 죽은 듯이 지내야 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사망 가운데에 계셨던 것처럼 바울도 유사한 경험을 합니다. 바울은 그토록 증오하던 예수님에 관한 편견을 철회해야 했습니다. 그건 어떤 면에서 자기 자신의 오래된 인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철학과 사상, 가치관을 폐기하는 건 무척이나 힘든 전환입니다. 바울이 앞을 보지 못한 채 식음을 전폐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토록 자기부인과 인식의 변화가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12세기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종교 전쟁의 폭력을 보여주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들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를 모욕한 신부를 살인한 발리안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됩니다. 발리안은 자신과 아내의 죄가 씻겨지길 바라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예루살렘의 이상은 허상에 가까웠습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도나 이슬람교도 할 것 없이 광신도들의 광기가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되는 곳이었습니다. 너나할것 없이 광신도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만행을 자행하며 살인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광신도들이 일으킨 전쟁을 막기 위해 십자군을 이끄는 보두앵 4세와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이 서로에게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며 모슬렘식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 깊습니다. 그 과정 중에 발리안은 참된 선량함은 올바른 행동과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용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매일 행하는 바가 선함과 악함을 판명하는 기준이 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soldiers-charging-on-horseback-in-kingdom-of-heaven.jpeg 영화 <Kingdom of Heaven> 중

사흘 동안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광신도였던 바울은 새롭게 세상을 인지하게 됩니다. 그는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시력을 회복합니다. 그건 그가 지금껏 인지할 수 없던 세상을 발견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발리안이 진정한 신앙을 깨달았던 것처럼, 바울도 다마스쿠스에서 편견에서 벗어나 신앙을 각성하게 됩니다. 그건 바울의 인생에 있어서 단절된 경험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연결된 인식의 확장이었습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건과 경험이지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분절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여정으로 느껴집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 발리안이 예루살렘에서 얻었던 그런 경험처럼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살아온 과거의 경험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단초가 되고 인식을 전환시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값진 것만 같습니다. 회심은 단순한 종교적 경험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각의 변화입니다. 바울과 발리안의 예에서 보듯, 진정한 회심은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고 포용적인 인식으로 나아가는 세계관의 전환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영적 성장의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삶의 순간순간에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통해 더 깊은 이해와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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