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한강 <채식주의자>를 읽고
우리의 삶은 폭력과 얼마나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가.
삶이란 지극히 폭력적이다. 좁게는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크고 작은 싸움이 그렇고, 넓게는 생존을 위한 의식주조차 다른 생명을 착취하는 폭력임이 그렇다. 우리 삶은 애초에 타자를 착취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모든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영혜의 결벽적인 몸부림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 폭력을 회피하려는 노력이 모순적이게도 우리 목숨이 폭력 없이 성립할 수 없다는 반증인 것이다. 식물이 아닌 존재의 태생적 한계다.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해 끝내는 나무가 되기를 소망하며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죽어가는 영혜의 이야기를 차례로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에서 다룬 것이다. 남편에서 형부를 거쳐 언니로 시점이 옮겨가며 영혜를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변해간다. 그것은 삶에 자리한 폭력을 받아들이는 민감도에 따른 차이일 것이다.
남편은 폭력에 무감한 인물이다. 타인의 고통에도 무관심하다. 냉장고나 세탁기를 이해하려 하는 사람은 없듯이 남편에게 영혜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아내는 가성비를 따져 구입하고 고장 나면 이해득실의 논리로 수리와 교체를 결정하는 가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1부의 시선은 몰이해로 가득 차 있고 영혜의 육식 거부는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표현된다. 그로부터 따라오는 문제가 점점 커지자 남편은 바로 영혜를 떠난다. 그에게 영혜의 고통은, 영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조금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다. 유일하게 1부가 1인칭으로 서술된 것도 외부세계에 관심이 없는 남편의 사고방식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1부 제목인 '채식주의자' 역시 남편이 영혜를 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명치에 수많은 목숨이 얹혀 이제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가슴이 답답하다는, 꿈속의 피 맛이 잊히지 않는다는 영혜의 호소는 그에게 가닿지 않는다. 모든 사연과 서사는 지워지고, 남편에게 영혜는 단순히 '채식주의자'로 일축된다.
2부에 이르러 형부의 시점에서 영혜는 마치 신비롭고 매혹적인 뮤즈처럼 묘사된다. 그녀 엉덩이에 남아 있다는 작은 몽고반점은 순진성의 상징처럼 그에게 강렬한 예술적 영감과 성적 흥분을 가져다준다. 영혜의 몽고반점에서 꽃의 이미지를 착안해 낸 것은 그가 식물이 되고자 하는 영혜 내면의 열망을 처음으로 알아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부 제목인 <채식주의자>가 영혜에 대한 남편의 몰이해를 보여준다면 2부 제목인 <몽고반점>은 형부가 폭력에 내성을 갖지 못하는 영혜의 순진성을 포착해 냈음을 보여주는 단서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포착에 지나지 않으며 영혜가 맞닥뜨리고 있는 고통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의 '비디오 예술'은(형부가 하는 예술이 다른 장르가 아닌 하필 비디오 예술이라는 점도 예술가로서 그의 고찰이 겉핥기에 그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영혜를 단순히 예술적, 개인적 욕망 표출의 대상이자 도구로 삼았을 뿐이다.
3부 <나무 불꽃>은 언니 인혜의 시점이다. 인혜는 유일하게 영혜 개인의 역사를 아는 인물이며, 영혜를 걱정하고, 영혜의 변화에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이 시점에서 영혜는 육식이 아닌 음식도 거부하며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있다. 투쟁이라고 해도 좋을 발악으로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또 온 힘을 다해 죽어가고 있다. 목에 음식을 주입하기 위해 넣은 삽관을 밀어내고 피를 토하는 영혜에게 삶은 마지막까지도 폭력 그 자체이며, 영혜는 이에 극렬히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서두에서 밝혔듯 우리의 목숨 부지함은 애초에 폭력으로 성립하는 것임에도.
그런 점에서 영혜는 알레르기 환자와 비슷한 데가 있다. 알레르기는 몸의 면역체계가 특정 물질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질환으로 실제로는 해롭지 않은 것을 해롭게 인식하여 반응한다. 가령 땅콩 알러지가 있는 사람의 면역체계는 소량의 땅콩에도 과민하게 반응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흙이나 나무 같은, 자연적으로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에도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영혜는 말하자면 그런 사람인 것이다. 우리 존재는 폭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에도 아주 소량의 폭력에도 격한 면역 반응을 일으켜 자신마저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런 자질은 태생부터 있었다가 자라나는 동안 폭력이 점점 누적되며 어느 날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을 것이다.
3부에서 묘사되는, 영혜의 삶을 강제로 이어가기 위한 일련의 폭력적인 과정은 차마 읽어 내려가기 버겁다. 눈살을 찌푸리고 그 고통스러운 현장에 참관하다 보면 이 책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삶은 곧 폭력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3부에 걸친 긴 이야기는 그저 우리가 존재만으로 무고할 수 없는 원죄의 목숨임을 시사하는 것일까? 그런 비관주의를 전하는 것일까?
그러나 3부에는 그 의문에 조용히 다른 답을 주는 존재가 있다. 인혜의 아이, 지유다. 모든 폭력을 거부하고 죽음으로 저물어 가는 영혜를 지켜보는 고단한 인혜의 삶 다른 한편에 놓여 있다. 엄마가 웃자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어떻게든 엄마를 웃게 만들려는 작은 몸짓을 멈추지 않는 아이. 이렇다 할 대사도 서사도 없지만 작중에서 영혜 다음으로 많이 이름이 불리우는 지유는 인혜 삶에 고통 외의 다른 것을 불어넣는 존재다. 이 무구한 존재가 「채식주의자」가 그저 비관론이 아닐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 자식에게 손찌검을 서슴지 않고, 개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 전쟁에서 '베트콩'을 많이 죽인 것을 자랑으로 삼는 아버지는 폭력 그 자체였고, 인혜와 영혜 자매가 그 폐허였다면, 지유는 변할 수도 있는 다음 세대의 작은 희망과 가능성의 단서다.
「채식주의자」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 곧 삶에 대한 이야기다. 삶의 모습은 다양하여 삶은 실은 얼마든지 사랑이라 할 수도 있고 연대라고 할 수도 있다. 또는 회복이라고 할 수도 있고 화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많은 것 중에서 삶을 말하는 수단으로 작가가 폭력을 고른 것은 어쩌면 '영혜'가 한강의 페르소나여서일 지도 모른다. 영혜가 다름 아닌 작가 본인이어서, 폭력에 너무도 민감하여 역사 속에서, 일상 속에서 자행되고 되풀이되는 수많은 폭력에 과민함을 앓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랬듯이.
여운이 길게 남는 책이다. 남을 해쳐 이어나가는 이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세상과 화해하며 살아가야 할까. 어두워져 가는, 길 잃은 숲 속에서 집에 가는 게 더 두려워서 '집에 돌아가지 말까' 했던 어린 영혜의 모습이 책을 덮고서도 눈에 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