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은희경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읽고
은희경 <새의 선물>은 오래전부터 내 인생 소설이다. 나는 일상 속에서 자주 진희를 떠올린다. 가끔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을 때 진희를 떠올리면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뻔한 거짓말을 믿어줄지 말지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보통 그냥 속아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리고 한두 번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상관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게 어디까지나 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에 정말 진심으로 넘어가는 건 곤란하다. 내가 처한 상황이 남들과는 다르며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믿어서야 인생이 고달파진다. 내가 전전긍긍하는 이 상황이 실은 흔해 빠진 일이며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반복해 온 실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깨달음을 스스로 주지시킬 때 <새의 선물> 속 진희를 생각하게 된다.
진희는 그런 면에서 삶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아이였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사회 규범이 그어놓은 경계선 안에서 살아가는 어른들 틈에서 일찍이 세상의 숨겨진 구조를 볼 줄 알았다. 사회적 금기에 얽매이지 않고 내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아이였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진희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삶 속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진희'는 세상살이 속에 있지만 '바라보는 진희'는 바깥에 있기 때문에 삶의 모순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진희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희가 어른이 된 후의 이야기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 진희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나이에 비해 영민하고 영악하여 애어른 같았던 어린 진희와 달리, 어른이 된 진희는 어쩐 일인지 작고 볼품없이 느껴진다. <새의 선물>에서의 진희는 '바라보는 나'로서의 진희였고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의 진희는 '보여지는 나'로서의 진희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더 진짜 진희에 가까울까.
<새의 선물>에서는 '바라보는 나' 쪽이 숨겨진 진짜 진희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삶의 고통을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무용한 회피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진희는 고통을 직면할 힘이 없어 '바라보는 나'라는 허상을 만들어 고통을 희석해 왔을 뿐이다.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본들 결국 '보여지는 나'가 진짜다. 그리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챕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러한 노력에도 결국 고통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일이다. 삶의 고통을 피할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을 피하려 택한 방식이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올 뿐이다. 배신의 고통이 두려워 사랑하는 남자를 버렸지만 그것이 이미 그 자체로 고통이었듯이. 진희는 무력하게 자신의 실패를 시인한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그런 방식을 그만둘 수 없음을 고백한다. 고통을 회피하려 택해온 방식이 곧 진희의 삶 전체였기 때문이다.
진희는 열두 살 때 이미 자신이 더 자랄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아무런 이변 없이 정말 열두 살 때 예견한 그대로의 어른이 되었다. 만일 진희를 삶 속으로 끌어당길 누군가가 있었다면, 뿌리 깊은 비관론을 부숴줄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달랐을까. 하지만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진희에게는 충분히 있었던 듯도 보인다. 이복동생 애리도 있고, 친절했던 새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었고, 많은 연인들도 있었고, 낳을 수 있었던 아이들도 있었다. 기회가 있었지만 스스로 잡지 않은 것에 가깝다. 진희는 비겁자일 수는 있지만 피해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아니다. 진희의 삶은 누군가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다. 진희는 관망하는 자로서 자신의 삶에서 한 발짝 떨어진 거리감을 유지하며 살아가기를 스스로 택했으며, 그 몫을 오롯이 감당할 뿐이다. 그건 비겁하거나 어리석은 방식일지라도 어찌 됐건 진희의 방식이다.
책의 제목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오래된 팝송 <save the last dance for me>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에 눈물 짓는 여인과 함께 카페에서 등장했던 이 곡은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진희는 승객을 되는 대로 태운 합승 택시에 실려 있고, 서로를 모르는 이들 사이로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제목으로 채택된 노래가 마지막 장면에 재등장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장면이어야 마땅하지만 이 책에서 노래의 의미는 의미 없음에 있다. 이름 모를 취객은 음악이 방해되니 라디오를 끄라고 하며 이 곡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일축해버린다. 그리고 주인공인 진희는 속으로 그에 동의한다.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용론을 펼침으로써 진희는 마지막 춤의 가치를, 사랑의 유일성을 더럽힌다. 마지막 춤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이 순간 춤을 즐길 뿐이라고. 그것이 바로 진희가 소중한 것을 갖는 방식이다. '마지막 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상처가 뒤따를 것임을 확신하기에 그저 춤을 추는 것에 만족하며 행복을 이 순간으로 한정 짓는 것.
누구나 마지막 춤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음악이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다. 마지막 춤을 추자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사랑은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 So darling, save the last dance for me.
- So darling, save the last dance for me.
신문관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저, 라디오 좀 끌 수 없소? 시끄러워서 말을 할 수가 있나. 기사도 지지 않고 은근히 야유를 던진다. 좋은 노랜데 조금 들어보시죠. 남자는 콧방귀를 뀐다. 좋으나 마나 지금 노래가 무슨 상관이야.
그의 말이 맞다. 춤 상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인가. 춤을 즐기면 그만이다. 모든 게 다 마지막이다. 마지막 춤이 아닌 것은 없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 춤도 없다. 단지 춤뿐이다.
누구는 진희를 겁쟁이에 바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삶이 두려워 제대로 살지 않고, 사랑이 두려워 사랑을 기만하는 모순이 어리석다고. 하지만 누구나 고통을 견디는 힘이 다르다. 미리 피하는 것만이 생존 방법인 인간도 있는 것이다. 진희가 가여웠다가, 나와 다르지도 않은 것 같아 연민을 접게 된다. 적어도 진희는 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춤을 춘다.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마지막 춤은 아닐지라도. 음악을 끄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