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김라일락의 계절에 향기로 남은 멤버에게
미스김 라일락 향기가 짙어지는 계절이 오면, 우리 가족의 ‘창립 기념일’도 함께 찾아온다.
시아버님의 노환으로 이른 나이에 식을 올려야 했던 우리는 5월 5일을 결혼식 날로 택했다. 그야말로 ‘어린이가 어른이 된 날’이었다.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난 옛이야기가 되었다. 비록 창립 멤버 한 사람이 곁에 없지만, 우리의 기념일은 변함이 없다. 아니, 변해서는 안 되겠지.
매년 이날이 오면 “우리 가족 창립 기념일이라 나라에서도 빨간 날로 쉬어준다”며 거창하게 큰소리치며 웃곤 했다. 마침 올해부터는 5월1일 노동절까지 공휴일이 되어 그야말로 온전한 휴일이 되어, 막내딸과 나는 2박 3일 일정으로 큰딸이 사는 부산으로 향했다.
남편과 함께 다녀온 작년 11월의 부산이 떠오른다. 당시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딸네 집에 가는 길을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는 끝내 내게 운전대를 내어주지 않았다. 상남자 포스를 풍기며 괜찮다던 그는, 마치 마지막임을 예감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또 이렇게 부산에 올 수 있을까?”
“당연하지! 오고 말고. 몇 번이고 다시 와야지.”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오갔을까.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짐작하고 있었을까.
내려가는 길, 작은딸과 번갈아 운전대를 잡으며 추억에 웃기도 하고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비록 가족 창립 멤버의 구성은 바뀌었지만, 분위기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금은 차분해졌을지언정 우리의 웃음소리는 여전하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으며, 우리는 다시 부산에서 모였다.
내 카톡 프로필 사진 속, 노란 테 선글라스가 사위의 마음에 닿았나 보다. 곧 태어날 아기 선물을 사러 나가는 길, 사위는 내게 선글라스를 선물하고 싶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그 샛노란 선글라스에는 남편과의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던 보홀의 기억이 서려 있다. 여행 전날, 인터넷 면세점 창을 열어둔 남편이 내게 물었다.
“선글라스 하나 골라봐.”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저 당신이 사주고 싶은 검정 테로 아무거나 사달라며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공항 라운지에서 물건을 확인하던 순간, 나는 경악했다.
“이게 뭐야? 물건이 잘못 왔나 봐!”
당황한 남편이 주문 내역을 다시 확인하니 품번 끝에 ‘ye’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가 실수로 ‘Yellow’를 선택한 것이었다.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괜찮아! 이런 실수가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노란색을 써보겠어? 나랑 완전 찰떡인데? 나니까 소화하는 거야, 하하하!”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볼수록 매력적인 그 노란 테를 보며 우리는 여행 내내 웃었다. 덕분에 내게 노란 선글라스는 쓸 때마다 마음이 환해지는, 세상에 하나뿐인 애정템이 되었다.
딸과 사위가 안내한 매장에서 호기롭게 외쳤다.
“자, 다들 내게 어울릴 만한 걸 찾아보도록!”
만장일치로 골라진 새 선글라스를 쓰니 마음이 참 좋았다.
그 행복한 순간, 솟구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꿀꺽하고 삼켜냈다.
30년 넘는 역사의 창립 멤버 구성이 바뀐 우리 가족은 자동차 안에서도 전과는 다른 자리에 앉아 여전히 그를 생각한다.
딸을 보러 다녀온 길이지만, 꼭 긴 여행을 마친 듯 피곤함보다는 행복감이 크다. 그러다 문득 나만 행복한 것 같아, 홀로 외로운 별에 머물고 있을 그가 떠올랐다.
주황색 장미 스무 송이를 선물 받으며, 그중 열 송이는 그를 위해 보내겠노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치여 잠시 소홀했던 마음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서둘러 그를 만날 채비를 시작했다. 왕터를 떠나면서 다 나눠주었을 것 같은 꽃바구니와 플라워폼을 베란다 구석에서 찾아냈을 때의 그 반가움이란.
‘다 버리지 않았구나, 내 분신 같은 이것들을 다 나눠주지는 않았구나’ 싶어 마치 그를 마주한 듯 가슴이 벅찼다. 거실과 식탁을 장식하던 주황색 장미들을 뽑아 작은 바구니를 만들다 보니, 빈자리를 채울 재료가 조금 부족했다.
추모 공원에서 꽃을 더 살까 고민하다 문득, 우리가 정성껏 옮겨 심은 ‘미스김 라일락’이 떠올랐다.
라일락향과 꽃을 엄청 좋아하는 그는 매년 라일락 꽃이 필 때면 참 행복해했다.
"왜 미스김 라일락이야? "
" 라일락 꽃나무는 원래 큰 종인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더교수가 북한산에서 채집한 씨앗 중에서 한국에서 자생하는 작은 라일락을 미국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미스김이라고 붙였대"
조경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그는 친절하게도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이미 왕터 집에는 미스김라일락 화단이 있음에도, 그는 굳이 외대로 멋지게 키워보겠다며 작년 늦은 봄에 화원에서 두 그루를 샀었다. 왜 두 그루냐 묻는 내게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무를 심더니, 다 심고 나서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그루는 너고, 그 옆에 한 그루는 나야.”
그 미스김 라일락 두 그루를 왕터 집을 떠나오기 전에 옮겨 심었다. 왕터에서 데려와 지금은 형님 댁 화단에 뿌리내린 그 두 나무가 고맙게도 건강하게 자라 꽃을 피웠다. 한때는 이 꽃이 피면 슬퍼서 어찌 볼까 걱정했는데, 막상 마주한 꽃은 그저 예쁘기만 했다. 꽃을 보는데 슬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주황색 장미 사이사이에 라일락을 꽂으니 향기가 참 좋다. 이 향을 그가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다. 놀아달라고 보채는 강아지 왕이를 뒤로하고 서둘러 그에게 향했다.
"여보, 보고 싶어서 왔어. 우리 가족 창립 기념일이 내일모레잖아. 당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곁에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아. 당신은 여전히 우리 가족의 영원한 창립 멤버니까. 당신이 실수로 골랐던 그 노란 선글라스가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사위가 새 선글라스를 선물해 주더라. 당신만큼이나 세심한 그 마음이 참 고마웠어. "
이제 곧 태어날 손주의 어린이날과 창립 기념일이 겹치면 우리의 하루는 더욱 떠들썩하고 깊어질 것이다. 세월이 흘러 풍경은 변하고 구성원은 바뀌어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뿌리내렸던 그 시작의 계절을.
"여보, 내가 전하는 이 꽃과 향기, 기쁘게 받아줘. 고맙고, 사랑하고, 또 고마워."
#미스김라일락 #가족창립기념일 #30주년결혼기념일 #그리움의향기 #당신은영원한멤버
#꽃을보며슬퍼하지않기로했다 #다시쓰는가족사 #이멤버리멤버 #슬픔을지나행복으로
#기억의습작 #가족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