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영토를 찾아서 - 책상 연대기

쌀가마니를 치우고 얻어낸 열한 살의 첫 독립

by 엔도르핀 본비

쌀이 유명한 경기도의 어느 농촌 마을,

나는 'ㅁ'자 형태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채는 안방과 마루를 중심으로 마룻방과 부엌이 이어졌고, 마루 밑으로는 지하 공간이, 부엌 입구에는 작은 광이 있었다. 전면이 미닫이 유리문으로 되어 있어 꽤 근사해 보였던 나무 마루 위에서 나의 유년은 흘러갔다.

마룻방은 방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내 몸이 쑥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쌀항아리 세 개가 든든하게 자리를 지켰고, 그 옆으론 자개 차단스라 불리던 그릇장과 여름에나 트는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우리 집의 보물 1호였던 검은색 다이얼 전화기가 있었다.


전화기가 귀하던 시절이라, 우리 집 전화기는 마을 공용 전화기나 다름없었다. 안방에 두기엔 번거로워 마룻방에 두었는데, 이웃 아주머니들이 미리 와서 전화를 기다리다 벨이 울리면 긴 줄을 마루까지 끌고 나와 통화를 하곤 하셨다. 처음 전화기가 들어왔을 땐 그 소리가 어찌나 신기한지 '따르릉' 소리만 나면 냅다 달려가 "여보세요?"를 외쳤다. 덕분에 동네 전화 심부름을 하느라 꽤나 뛰어다녔지만, 그마저도 재미없어질 즈음엔 꾀가 나기도 했다. 따스한 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싶은데 벨이 울리면, 수화기를 들고 "여기 아무도 없는데요"라고 대답하던 맹랑한 꼬맹이가 바로 나였다.


마당 너머엔 할머니가 계시던 사랑방과 윗방이 있었고, 그 옆으론 비료포대와 농기구들이 가득한 어둑하고 눅눅한 창고가 있었다. 창고 옆에는 작은 아빠의 신혼방이었던 건넌방으로 포대기에 업힌 내게 화장대 거울을 비춰주며 "까꿍" 웃어주던 작은엄마의 방이 있다. 이 기억을 얘기하면 작은 엄마는 매우 놀라시는데, 아마 내 첫 번째 기억이지 싶다.

소 한 마리가 묶여 있던 외양간과 푸세식 화장실까지. 길가로 난 큰 나무 대문 옆에 용달차도 마당으로 들어올 수 있는 번듯한 초록색 철제 대문까지 새로 세운 걸 보면, 우리 집은 제법 밥은 먹고사는 시골집이었다. 문이 드르륵 닫히는 다리 달린 텔레비전을 마당으로 들고 나와 동네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보던 여름밤. 나의 '책상 연대기'는 이토록 북적이고 풍요로웠던 집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나는 할머니, 언니와 함께 사랑방에서 잠을 잤다. 그 방에는 할머니의 보물창고 같은 장롱, 그리고 넓고 듬직한 앉은뱅이 나무 책상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멋진 책상은 낮 동안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 할머니의 두툼한 이불 보따리를 받쳐주는 받침대로 쓰이곤 했다.

방의 주인인 할머니는 초저녁 잠을 한숨 자고 나면 꼭 장롱을 정리하시곤 했다. 장롱 안에는 할머니의 옷가지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할아버지의 유품들이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주머니에 차고 다니셨다는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할머니는 늘

“니 할아버지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옛이야기를 꺼내셨다.

“할머니, 나 졸려. 그 얘기 지난번에도 들었잖아. 불 꺼줘, 잘 거야!” 어린 손녀의 투정 섞인 대꾸에도 할머니의 추억 여행은 그칠 줄 몰랐고, 결국 할머니 특유의 싫지 않은 눈 흘김과 찰진 욕 몇 마디를 들어드리고 나서야 장롱 정리는 끝이 나곤 했다.

어떻게 하면 할머니의 끝없는 이야기와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나는 기막힌 돌파구를 찾아냈다. 바로 이불더미 아래 잠들어 있던 그 책상을 깨우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어 이부자리를 펴고 책상이 얼굴을 드러내면,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시간이 시작되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시늉을 하면 할머니는 말씀을 삼가셨고, 방해될까 조용히 텔레비전에만 집중하셨다. 잔소리 대피소이자 나만의 아지트가 생겨난 셈이었다.


책상을 쓰기 전에는 별 수 없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숙제를 했다. 엎드려 책을 읽고 수련장을 풀다 보면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동아전과를 펼쳐 들면 풍경이 달라졌다. 엄마는 공부하는 딸들이 기특하셨는지 접시에 간식을 정성껏 담아 내오셨다. 그 간식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무언의 응원이자 칭찬임을 알았기에, 언니와 나는 간식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공부하는 흉내를 꽤 내곤 했다.

아빠가 쓰셨다던 그 널찍한 책상은 오직 밤에만 나타나는 ‘밤의 책상’이었기에 늘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낮이나 이른 저녁엔 엄마가 펴주신 좌식 둥그런 밥상이 책상을 대신했다. 밥상에 흠집이 난다며 할머니가 몇 번 잔소리를 하기도 하셨지만, 엄마의 든든한 응원 덕분에 언니와 나는 밥상머리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숙제를 할 수 있었다. 어느덧 남동생까지 그 틈에 끼어들었고, 밥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삼 남매의 모습이 보기 좋으셨는지 엄마는 연신 즐거운 표정으로 간식을 실어 나르셨다.



마당 한구석에는 꼬리를 살랑거리던 새끼 강아지 몇 마리가 살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급식으로 나온 우유를 먹지 않고 아껴두었다가 엄마 몰래 강아지들에게 따라주곤 했다. 핥아먹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강아지들과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 북적거리던 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어디 갔지? 다들 어디 갔니?" 강아지들의 행방을 묻기도 전, 집 앞에 멈춰 선 용달차 한 대가 나의 시선을 빼앗았다.

용달차에서는 나무로 된 멀티 가구가 마루 앞 봉당으로 내려졌다. 하단에는 서랍이 세 칸 있고, 책상 판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상단 책꽂이 형태의 근사한 가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짙은 연두색 철제 앉은뱅이책상과 빨간색 두발자전거까지 마당에 내려앉았다. 한껏 상기된 표정의 엄마는 시장에 나가 강아지들을 팔아 이 책상들을 사 왔노라 말씀하셨다. 아끼던 강아지들을 보내버린 엄마가 야속하고 서운해 마음이 아렸지만, 그토록 원했던 내 책상을 마주하니 이내 입가엔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어린 마음에도 그 작은 좌식 책상이 참 좋았다. 언니에게는 빨간 자전거를, 내게는 책상을 선물해 주신 그날. 따스한 햇살 아래 우리 자매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던 그 풍경은 지금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내 책상'으로서의 영광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안방에 다리 없는 컬러텔레비전이 새로 들어오면서, 내 책상은 애석하게도 텔레비전 받침대로 ‘착출’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공부가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열한 살 혹은 열두 살 무렵의 어느 초여름, 나는 엄마를 졸라 사랑방 윗방을 내 공부방으로 쓰겠노라 ‘독립 선언’을 했다.


사랑방 윗방은 사실 방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웠다. 방문이 어찌나 작은지 이마를 부딪히기 일쑤라 초등학생이었던 나조차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아빠의 철제 책상과 세월의 먼지가 뽀얗게 쌓인 소설책 한 질, 계절 옷이 담긴 서랍장과 비닐 옷장이 빼곡했다. 구석에는 쌀가마니와 어쩌다 쓰는 소쿠리와 커다란 고무 대야까지 굴러다니는 어수선한 공간이었지만, 나에게 그곳은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한 방이었다. '독립'을 꿈꾸는 내 눈에는 이미 세상 그 어디보다 아늑한 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며칠을 엄마와 아빠에게 매달린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구들장이 막혀 불이 들어오지 않는 방이니, 겨울에는 다시 할머니 방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상관없었다.


드디어 온 가족이 모여 기분 좋은 대청소를 시작했다. 아빠의 철제 책상과 5단 서랍장은 그대로 두되, 서랍장 위로 아빠의 오래된 책들을 옮기고 그 빈자리에 내 교과서와 전집 동화책을 꽂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다. 어디서 본 풍경이었을까, 나는 다시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명절이나 제사 때나 구경할 수 있었던 널찍한 옻칠 교자상을 책상으로 쓰게 해 달라는 억지였다.

시어머니인 할머니의 눈치를 보던 엄마는 결국 "상이 필요할 땐 언제든 내놓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셨다. 엄마가 시집올 때 해왔다는 자수 놓인 하얀 테이블보를 교자상 위에 덮으니, 내가 꿈꾸던 완벽한 책상이 완성되었다. 좁고 어수선하던 창고 방이 근사한 공부방으로 변신한 것을 보며 아빠도, 엄마도, 할머니도 기특한 듯 문턱에 자주 앉아 쉬다 가셨다. 그 무언의 응원 속에서 나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나의 이른 사춘기를 평온하게 지나 보냈다.

방 문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우면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안채 뒤 야산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밤나무가 보였다. 세상에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었던 완벽한 만족감. 그 여름날의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어느덧 그 방은 언니와 남동생도 찾아와 공부하는 우리 집만의 '도서관'이 되었고, 엄마는 그 모습이 대견하신지 늘 행복한 얼굴로 간식을 내오셨다. 그때의 엄마를 떠올려본다. 어쩌면 나는 엄마에게 무엇을 해도 믿음직스러운, 응원해주고 싶은 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엄마가 된 이제야 비로소 그 마음이 보인다.

저녁이 되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주파수가 잡혔다 말았다 하는 라디오를 곁에 두고, 백열등 불빛 아래 벽에 기대어 무언가를 끄적이는 시간이 참 좋았다. 다만 여름밤의 불청객 모기가 극성이었다. 어느 날 밤에는 모기를 기필코 다 잡겠다는 일념으로 모기향을 토막 내 방 안 곳곳에 피워두고 잠이 들었다. 딸이 잘 자고 있나 문을 열어본 엄마는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찬 방을 보고는 "모기 잡으려다 사람 잡겠다"며 화들짝 놀라 소리를 치셨다. 모기향이 사람에겐 해롭지 않은 줄 알았던, 참 맹랑하고도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두꺼운 솜이불 사이에서 냉기가 느껴질 즈음에는 할머니 방으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는 밤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중학교 1학년까지 계절에 따라 윗방과 사랑방을 오가며 지내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중학교 2학년 초입, 아빠가 갑자기 학교로 찾아오셨다. 전학 처리를 마친 아빠와 터미널 앞 식당에서 말없이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는 곧장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의 첫 서재였던 사랑방 윗방, 하얀 보를 씌운 나의 첫 교자상 책상, 바람에 흔들리던 밤나무와 욕을 참 잘하시던 다정한 할머니까지. 자식 공부를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온 그 길 끝에서 나의 유년기 '책상 연대기'의 첫 장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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