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나도구
피규어 앞에서 지갑이 열리는 속도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열성적인 수집가(덕후)들은 월급날이 오면 통장을 거쳐 피규어 샵으로 돈을 직행시키곤 하죠.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수집은 결코 피규어 단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피규어에 맞는 콘셉트 의상, 미니어처 소품, 교체용 파츠까지 사 모으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피규어를 중심으로 거대한 작은 세계관이 완성되어 갑니다.
이것이 단순한 '장난감 덕질'처럼 보인다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구입하는 건 최고급 우레탄 소재로 인체의 질감을 섬세하게 재현하고, 수십 개의 관절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고급 수집품이니까요.
심지어 이 미니어처 수집 문화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되었습니다.
고대 일본에는 매년 3월 3일마다 치러지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여자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남녀 한 쌍의 화려한 인형을 단상에 올리는 '히나마쓰리(雛祭り)' 축제였죠. 인형이 아이의 액운을 대신 흡수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축제가 끝나면 인형을 강물에 띄워 보내 액운까지 함께 흘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귀족들이 슬그머니 이 마지막 절차를 생략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형을 버리는 대신, 실내에 고이 모셔 두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두는 게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친딸을 대하듯 정성스럽고 화려하게 꾸미면서요.
고관대작들은 여기서 한술 더 떠, 딸이 훗날 시집갈 때 가져갈 혼수품을 미니어처로 제작해 인형 곁에 나란히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딸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과, 가문의 격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과시욕이 하나의 진열대 위에서 조용히 만난 순간이었습니다.
이 정교한 인형용 소품들은 히나도구(雛道具)라 불립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난감 모형이 아니었습니다. 가문의 문장이 정교하게 새겨지고, 금가루가 고르게 뿌려진 최고급 옻칠 공예품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장인이 아니고서는 감히 만들 수 없는 물건들이었죠.
18~19세기, 히나도구의 정점에는 '나나사와야(七澤屋)'라는 전설적인 공방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구사한 게시자이쿠(消し細工)라는 기술은 실제 생활용품을 완벽하게 축소해 재현하는 극한의 세공 기술입니다
이 공방이 만든 미니어처 가구의 서랍은 실제로 열리고 닫혔으며, 2cm도 채 안 되는 인형용 책 안에는 진짜 책의 내용이 육안으로 읽기 힘들 만큼 작게 그대로 필사되어 있었습니다.
소품의 구성도 치밀했습니다. 백인일수(百人一首, 시가 적힌 전통 카드 게임), 바둑판, 각종 현악기까지 갖춰져 있었죠. 즉, "우리 가문의 딸은 아름답고, 부유하며, 수준 높은 교양까지 갖추었다"라는 메시지를 인형 세트 하나가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19세기, 이 히나도구 수집 열풍은 귀족을 넘어 부를 축적한 상인 계층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에도 막부는 이를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상인들의 사치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사치 금지령이 잇따라 내려졌고, 금지 품목에는 사치품의 크기 제한이 명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의 대응은 영리하고 교묘했습니다. 히나도구를 통해 소품의 '크기'는 규정에 맞게 줄이되, 그 안에 들어가는 공예의 '밀도'를 극한으로 높인 것입니다.5cm 남짓한 좁은 소품에 당대 최고급 옻칠과 금박을 집약시켰습니다.
법적 규정을 피하는 조그만 소품 안에 담긴 장인의 공력과 가격은 극도로 호사스러웠죠.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아는 사람끼리만 알아보는 은밀한 방식으로 부를 과시한 것이었습니다.
2020년대 들어 명품 시장이 대중화되자, 노골적인 로고 과시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형 로고가 가득한 가방 대신, 압도적인 소재와 미세한 질감만으로 품격을 드러내는 제품들이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스카프 같지만, 만져보는 순간 차원을 달리하는 로로피아나(Loro Piana)의 캐시미어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른바 스텔스 럭셔리(Stealth Luxury)의 유행이 시작된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현대에 뚝 떨어진 새로운 트렌드가 아닙니다. 에도 시대의 부유한 상인들이 규제의 눈을 피해 5cm짜리 옻칠 소품 속에 호사스러움을 숨긴 것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으니까요.
스웨덴의 거대한 재벌가인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유명한 신조가 하나 있습니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진정한 럭셔리와 부의 정의는, 이미 200년 전 에도 시대의 작고 은밀한 인형 진열대 위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