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1층 명품관에 자리 잡은 까르띠에 부티크에 젊은 커플이 들어갑니다. 잠시 후 그들의 손에는 국민 예물 반지인 18K 골드 '러브링'이 끼워집니다. 같은 시간 종로 뒷골목의 보석상에서도 수많은 커플이 14K 골드 반지를 착용하며 사랑을 다짐합니다.
비록 까르띠에 반지가 종로의 금반지보다 훨씬 비싸지만, 그들의 손에 올려진 반지는 적어도 순금이 중량의 58.5%(14K)에서 75%(18K) 이상 포함되어 있습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엄연한 금(Gold)이라 볼 수 있죠.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물로 당연하게 금을 선택하는 문화는 1970년대 이후, 경제가 성장하고 금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던 시기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입니다. 근대화가 시작되던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만 해도, 서민들은 금 구경은커녕 은(Silver)조차 감당하기 벅찼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문학 작품을 살펴볼까요?
"울 엄니는 시커먼 송장 속에서 '구리 가락지'가 번뜩이갖고 찾고, 울 아부지는 어째 발목이 덜 타갖고 그걸 보고 찾았음께" _강경아, 「동백의 증언」
"끓인 간장 단지 속 들여다보니, 갓 서른에 혼자된 어머니가 끼고 있던 '백동 가락지', 음력 이월의 그믐달에 들어 있다." _장옥관, 「내 속의 자연」
이 작품들은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하기 전인 20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합니다. 「동백의 증언」은 1948년 여순 사건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의 신원을 시신에 눌어붙은 구리 반지로 확인하는 비극을, 「내 속의 자연」은 1950~60년대 고단했던 어머니의 반지를 회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반지의 소재는 모두 구리 합금입니다. 또한 '가락지'라고 언급된 점에서 반지의 주인이 기혼 여성이며, 맥락상 혼인 예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문학 작품들은 당시 서민들이 예물로 낄 수밖에 없었던 소재를 뼈아프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순은(銀) 가격은 1돈에 약 40원이었습니다. 가락지 한 쌍에 1.5돈이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세공비를 포함해 약 100~150원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일반 노동자가 꼬박 하루를 뼈 빠지게 일해야 겨우 만질 수 있는 일당과 맞먹는 가격이었습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단 하루 치 일당이니 저렴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화 시기, 우리 조상들의 삶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농민들은 보릿고개에 굶주렸고, 도시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절대 빈곤' 상태였습니다.
번 돈을 사실상 전부 식비와 사글세(보증금 없이 몇 달 치 방세를 선불로 내고 거주하는 방식)를 소모해야 했기에, 장신구인 은반지를 산다는 것은 서민들에게 무리였습니다. 은반지를 맞추려면 온 가족이 하루 이틀을 쫄쫄 굶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조부모와 증조부 세대는 '구리'라는 가장 헐값의 금속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0년대 기준 짜장면 한두 그릇 가격이면 맞출 수 있었던 구리 반지로 말이죠.
그렇다면 당시 서민들이 예물로 꼈던 구리 반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서민들은 중산층의 예물인 은반지를 흉내 내기 위해 하얀 빛깔이 나는 백동(白銅)을 주로 찾았습니다.
백동은 단어 그대로 하얀색 구리를 의미하며, 구리에 10~30%의 니켈을 섞은 합금으로, 우리나라 500원 동전이 니켈 25%짜리 백동입니다. 서민들이 백동을 선택한 이유는 구리치고 단단하며 부식이 덜 되고, 무엇보다 은과 색깔이 꼭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조선시대만 해도 니켈 합금 기술이 부족해 백동 자체가 고급 공예품 소재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근대식 화폐 주조와 함께 서양식 니켈 합금이 유입되며 서민들도 비교적 쉽게 백동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산업화 이전 대한민국의 금속 가공업은 처참했고, 동네 주물 공장에서 제대로 된 원료 잉곳(Ingot)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시대가 버린 고철을 녹여 가락지를 만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쓸모없어진 대한제국의 백동화가 그 원재료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상황이 더 처절해졌습니다. 미군이 버린 수많은 탄피가 주조 공장의 도가니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구리에 아연 30% 무게비가 섞인 황동 탄피를 녹이면 백동의 하얀 빛깔 대신 칙칙하고 누런빛이 났습니다.
은백색을 갈망했던 세공업자들은 남대문 도깨비시장(양키시장)에서 밀수한 맹독성 화공약품을 도금조에 풀고, 누런 탄피 반지 위에 억지로 니켈이나 은을 씌워 백동반지로 재탄생시켰습니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예물의 격도 달라졌습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귀금속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되었고, 비로소 평범한 서민들도 진짜 금반지를 예물로 마련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지금은 빛을 잃고 낡은 장롱 속에 잠든 할머니의 백동반지. 그 투박한 쇳조각은 가난을 딛고 가족을 건사해 낸 할머니의 청춘이 담긴 역사책이자, 한 개인의 치열한 삶이 녹아든 유산(Heritage)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