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린다. 요리는 못/안 한다. 엄마는 확신에 차 말씀하시곤 했다. "넌 그림 그리니까 요리는 마음먹으면 끝내주게 할 거야." 이 추측성 문장은 확인된 적 없다. 그런 '마음먹은' 적이 없어서다. 그러나 엄마에겐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재료 가지고 주물럭거려서 새로운 걸 만드는 게 똑같잖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 멘트를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을 보던 중 엄마가 한탄조로 말씀하신다. "넌 그림 그리니까 마음먹으면 요리는 끝내줬을 텐데." 사실, 놀라던 참이었다. 100명의 요리 고수가 실력을 겨루어 최고의 요리사 한 명을 뽑는 경연 프로그램인데, 튀어나오는 말들은 그림의 언어, 더 나아가 예술의 언어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었다. 요리와 예술이 "재료 가지고 주물럭거려서 새로운 걸 만드는" 영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얼핏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멘트에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하나 있다. <흑백요리사>에서 요리를 예술의 영역으로 훅 끌어올린 지렛대, 바로 안성재 심사위원이 그토록 강조했던 '의도'다.
"어느 정도 실력이 검증된 분들이 오셨는데... 당연히 맛있고 의도된 바가 정확히 전해져야 돼요."
-안성재, <흑백요리사> 제1화
예술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는 흔히 '창작'이라는 단어가 붙어 '창작 의도'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미술관에서 작가, 제목, 재료와 같은 기본적인 작품 정보와 함께 작가의 창작 의도가 텍스트로 설명되어 있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작가의 창작 의도는 주제의식을 겨냥한다. 관객이 예술가의 창작 의도를 파악하고 주제의식에 공감한다면 그 작품은 최소한 작가와 관객의 소통에 성공한 경우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관객에게 가 닿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소위 대가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미술관에 붙은 작품 설명글이 감상을 오히려 방해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러나 작가가 모종의 창작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통해 주제를 구현하려 한다는 전제 자체는 널리 인정된다.
고백하건대, <흑백요리사> 이전까지 나는 요리의 '의도'를 궁금해본 적이 없다. 일상의 음식은 만든 자의 의도보다는 영양에 균형이 잡혔는지, 양은 충분한지, 본인의 입맛에 맞는지를 기준으로 흔히 얘기된다. 이는 요리하는 자의 개성과 창의성이 드러난 파인 다이닝과 같은 음식을 비용 상 일상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현실과도 맞물려 있다. 그러나 요리가 '의도'라는 단어와 결합하는 순간 요리는 일상의 진부함과 생물학적 생존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요리의 '의도'는 <흑백요리사>가 테크닉에 통달한 장인의 얘기가 아니라 창의력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예술가의 얘기로 나아가기 위한 엔진이 된다. 안성재가 제1화에서 첫 번째 탈락자에게 설명한 탈락 이유는 맛이 없어서가 아니다. 요리에 대한 설명, 즉 요리의 의도가 실제 맛과 달랐다는 것이다.
미슐랭 별 세 개를 받았던 안성재에게 요리 경연대회에서 맛은 기본 조건이다. 초반에 맛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흑수저 요리사가 대거 걸러진 이후, 경연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맛 자체에 대한 언급이 줄어드는 이유다. 생존을 거듭한 요리사들은 요리의 맛을 신속히 인정받는 데 비례해서 요리의 '의도'를 심사위원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분투한다. 최현석 셰프는 흑수저 요리사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간장, 된장, 고추장을 은은한 맛으로 변주한 '제주 장트리오'로 백종원에게 극찬을 들었다. 그러나 안성재는 그 음식의 의도를 도대체 모르겠다며 전달력이 애매하다고 혹평했다. 경연이 진행될수록 참가자들의 요리에서 삶의 자취와 취향의 빛깔이 또렷해진다. 심사위원의 평가 기준에서 '창의성'이라는 단어가 점점 힘을 얻는다. 마지막 미션은 참가자들의 '이름'을 건 요리였다. <흑백요리사>에서 요리사의 인장이 찍힌 요리는 이렇게 '작품'이 되었다.